황산벌 전투 말고, 황산 전투... 칼이 지나간 자리에서 태어난 노래
[이병록 기자]
'황산 전투'라 하면 하나의 싸움을 떠올리기 쉽다. 이 땅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전투가 겹쳐 있다. 하나는 백제 계백 장군이 신라군과 맞선 황산벌(黃山伐) 전투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격파한 남원시 운봉읍 황산(荒山) 전투다.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한글로만 읽으면 같은 전투로 착각하기 쉬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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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원치마애불 여원치는 남원에서 운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황산 전투에서 승리의 방법을 가르쳐 준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이성계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
| ⓒ 이병록 |
왜구는 함양 사근내역에서 고려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왜구는 팔량치를 넘어 남원을 공격했다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여원치를 넘어 운봉을 거쳐 인월 쪽으로 이동했다. 이성계 역시 남원에서 출발해 여원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했다. 결국 양쪽 군대는 운봉 황산 일대에서 맞붙게 된다.
이성계의 주력은 가별초였다. 이 부대는 고려 말 북방 전장에서 단련된 기병 부대로, 여진·몽골·홍건적과 싸운 경험을 가진 정예였다. 병력은 1~2천 정도로 추정되지만,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전투에 나설 때 이들은 소라 껍데기로 만든 대라(大螺)를 불었다. 계곡에 울려 퍼졌을 그 소리는 아군에게는 용기를, 적에게는 공포를 주었을 것이다. 황산 계곡에 울린 그 나팔 소리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전투를 앞두고 이성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산에 올랐다고 전한다. 운봉 권포마을 뒤에 있는 고남산(846m)이다. 이산은 태조봉, 제왕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정상에 서면 운봉 들판과 황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에서도 들판 넘어 약 10km 거리로 황산이 보인다.
처음에는 전투 전날 부대가 하루 쉬는 날에 산에 올랐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포마을에 가 보니 고남산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마을 입구 설명문에, 정몽주가 권력이 펼쳐지라는 뜻에서 권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운봉 황산과 붙어 있는 정산봉에 올라 지형을 살피던 도중에 일어났다. 인월 지역 전승에는 이성계가 군사를 매복시킨 곳으로 동무(東茂)와 서무(西茂)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서무 일대에는 '피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전투는 낮에 시작되어 밤까지 이어졌다. 해가 저물 무렵 이성계가 "이 나라 백성을 굽어살피시어 달을 뜨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자 그믐밤에 보름달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 때문에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바람과 관련된 지명도 남아 있다. 아영면 내인리와 인풍리는 모두 '끌인(引)' 자를 쓰는데, 바람을 끌어와 전투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전투에서 왜장 아지발도는 이성계가 활을 쏘아 투구 끈을 맞추자, 이지란(만주 이름 퉁두란)이 입을 맞췄다는 전설 중의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한다. 왜군 생존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고, 고려군은 1600여 필의 말을 노획했다. 왜구가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니라, 일본 내전 과정에서 넘어온 정규군으로 상당한 규모의 장비를 갖춘 군대였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운봉 화수리와 인월리 사이 남천에는 '피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붉은색은 철분 성분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사람들은 그 붉은빛을 전투의 피와 연결해 기억해 왔다.
황산 전투를 기념한 승전비는 전투 후 약 200년이 지난 조선 선조 10년(1577)에 세워졌다. 현재의 비석은 197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옆에는 일제강점기 술 취한 일본 경찰이 부쉈다는 비석은 파비각에 있다. 또 이성계가 함께 싸운 장수들의 이름을 새겼다는 어휘각도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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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산과 동편제 마을 동편제 마을은 황산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에 있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황산이다. |
| ⓒ 이병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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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산전투와 동편제 마을 지도 전투가 있었던 곳에서 춘향전과 흥부전이 태어났다. |
| ⓒ 이병록 |
덧붙이는 글 | 결국 이 땅에 남은 것은 칼이 아니라 노래였다. 황산의 전쟁은 역사의 기록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소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황산 아래에서 울려 퍼진 동편제의 목소리는, 전쟁의 기억을 넘어 이 땅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글은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2권에 들어갈 내용을 절반으로 줄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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