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군 총격에 고립된 6살 소녀 힌드는 어떻게 됐을까
이란 초교 참사 맞물려 재조명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 올라

2024년 1월 29일, 가자 지구의 텔 알하와 지역.
대피 명령이 내려진 이 곳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던 팔레스타인 가족이 이스라엘 군의 총격을 받는다. 벌집이 된 차 안에서 살아남은 15세 소녀 라얀이 숨진 아버지의 휴대전화로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이슬람권 국가에서 활동하는 적십자 조직)에 다급하게 구조 요청을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고 있어요. 탱크가 바로 옆에 있어요."
순간 총성이 들리고 비명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긴다. 적신월사 콜센터 직원 오마르가 다시 전화를 걸자, 이번엔 6살 소녀 힌드 라잡이 전화를 받는다. 힌드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사촌 언니 라얀이 총에 맞았고,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고 말한다.

피 범벅이 된 채 숨진 친척들 사이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힌드가 차 안에 갇혀 있는 상황. 힌드는 "너무 무섭다. 빨리 와서 저를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피격 현장은 구조대가 8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힌드와의 전화는 자주 끊기고, 이스라엘 군의 총격 소리는 수화기 너머로 계속 들려온다. 하지만 적신월사는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접근 제한 지역인 피격 현장에 가기 위해선, 이스라엘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구급차 수십 대가 이스라엘 군에 피격 당해 많은 구급대원들이 사망한 터라, 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적신월사는 중재 기관인 적십자, 팔레스타인 보건부에 끈질기게 호소한 끝에 세 시간 만에 이스라엘 군으로부터 구조 허가를 받는다. 구급차가 이스라엘 군이 정해준 안전 경로로 피격 현장에 접근하지만,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연락이 끊긴다.
적신월사 직원들은 큰 충격에 빠지고, 사무실엔 정적이 흐른다. "설마 구급차마저…"
힌드와 두 명의 구조 대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12일 간 연락이 두절된 이들의 생사 여부는 이스라엘 군이 철수한 뒤에야 밝혀진다.


실화 바탕의 영화 '힌드의 목소리'(4월 중순 개봉)는 이스라엘 군의 총격으로 친척들이 몰살 당한 차 안에 갇힌 소녀 힌드를 살리기 위한 구조 요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담았다.
힌드와 적신월사 직원들 간의 실제 통화 녹음은 당시 구조 요원들이 느꼈던 무력감과 트라우마, 평범한 소녀의 일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극한의 공포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영화는 16일(한국 시간) 열리는 제 98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폭로한 이 영화가 새삼 주목 받는 건, 최근 이란 전쟁 중 발생한 이란 여자초등학교 폭격 사건 때문이다. 미군의 오폭 가능성이 큰 이번 폭격으로 학생과 교사 등 최소 175명이 사망했다.
'힌드의 목소리'를 연출한 튀니지 출신 여성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이 작품은 단순히 어린 소녀를 기억하기 위한 영화를 넘어, 행동의 촉구가 될 수 있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희망"이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브래드 피트,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를 비롯해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총괄 제작으로 이름을 올리며, 벤 하니야 감독과 뜻을 함께했다.
'힌드의 목소리'에서 총성과 비명, 더딘 구조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건, 티 없이 맑고 순수한 힌드의 심성이다. 적신월사 여성 직원은 불안에 떠는 힌드를 안심 시키기 위해 "유치원 어느 반이냐?"고 묻자, 힌드는 "나비 반"이라고 답한다. 힌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다. 바다에서 놀기 위해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길 기도했던 소녀였다.
힌드가 다녔던 유치원 이름은 '행복한 아이들'이지만, 가자 지구 아이들에겐 행복 보다 생존이 더 절박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뛰어놀며 자라야 할 아이들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잔학한 만행이 지금 이 시간에도 중동 땅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가 일깨워준다.

영화에서 적신월사 여성 직원을 연기한 요르단계 캐나다 배우 사자 킬라니는 지난 1월 말 사건 2주기 추모 행사에서 "힌드 라잡의 목소리는 차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퍼져나갔다"고 말했다.
'힌드의 목소리'를 수입한 영화사 찬란의 이지혜 대표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23분 간 기립 박수를 받았을 정도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라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영화라는 판단에서 국내에 들여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일부 극장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는데 관객 반응이 좋았다"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하면 더 많은 관객이 관심을 가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영화사 찬란과 파트너십을 맺고 예술 영화 수입을 하고 있는 배우 소지섭은 '힌드의 목소리' 예고편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만큼 이 영화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화사 찬란은 '힌드의 목소리'를 유료 관람한 관객 티켓 금액 당 129원을 적신월사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정현목 문화선임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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