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은 나의 이정표”…전국 목욕탕 찾아다닌 8년의 기록[여행토크]

여행지의 낯선 골목을 걷다 보면 낡은 건물 위 하늘로 우뚝 솟은 굴뚝을 마주할 때가 있다.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메마른 굴뚝.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겐 완벽한 여행의 이정표다. 남들이 유명 맛집과 인스타그램 핫플레이스를 찾아 헤매는 사이 그는 굴뚝 아래 자리 잡은 동네 목욕탕을 자신의 지도에 채워 넣는다. “여행지에서 목욕탕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목욕탕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는 김성진(53)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 여정들은 최근 ‘전국 목욕탕 탐방’(베르단디)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8년간 찾아다닌 전국 팔도 목욕탕 58곳을 담은 국내 유일 목욕탕 도감이다. 40년 전 인쇄된 ‘입욕권’ 티켓을 여전히 사용하는 서울 동작구의 ‘약수탕’, 비췻빛 욕실을 품은 한옥 목욕탕인 경북 경주의 ‘왕림탕’, 고대 로마를 연상케 하는 조각상들이 사방에 가득한 전남 목포의 ‘하남골대중탕’…. 책장 곳곳엔 사라져가는 공간을 붙잡기 위해 김씨가 내디딘 발걸음과 그가 마주한 목욕탕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 있다.
김씨에게 목욕탕은 어릴 때부터 친숙한 공간이었다. 동생과 손잡고 놀이터 가듯 친구를 만나러 목욕탕에 드나들었다. 그런 김씨를 본격적인 목욕탕 탐험가의 길로 이끈 건 2014년 일본 교토 거주 시절 마주한 일본 목욕탕 문화다. 욕실 안에 앵무새가 살고, 목욕 후엔 갓 뽑은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일본의 목욕탕들. 그에게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곳이 아니라 주인장의 취향이 담긴 공간이었다.

김씨가 지도 앱에 리뷰 한 줄 없는 전국의 목욕탕을 찾아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수십 년간 지역의 온기를 품어온 공간들이 재개발과 경영 악화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그를 길 위로 이끌었다.
김씨는 목욕탕을 ‘대중 속의 고독’을 느끼기에 완벽한 장소로 꼽는다.
“완전히 혼자인 외로움과 달리, 서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상태에서 얻는 ‘고독감’이 좋습니다. 그곳에서 지난 날의 반성, 앞으로의 계획 등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특히 탕에 몸을 담그고 멍하니 바라보는 벽화는 그에게 최고의 감상 대상 중 하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목욕탕 벽면을 살피다 보면 공간이 견뎌온 시간이 그려지기도 하고, 때론 유쾌한 상상력에 빠지기도 한다. 김씨는 “물 좋고 차가운 냉탕에 앉아 북극곰이나 폭포수가 그려진 벽화를 보고 있으면 꼭 그곳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김씨의 여행은 항상 이른 아침 목욕으로 시작된다. 정성껏 몸과 마음을 정돈한 뒤 뜨끈한 국밥 한 그릇과 커피 한 잔을 곁들이는 이 과정은 그를 이방인이 아닌 주민의 시선으로 동네를 바라보게 만든다.

목욕탕을 여행의 목적지로 삼다 보니 걷는 길도 달라진다. 오래된 목욕탕은 대개 미로 같은 골목 안 주거지역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김씨는 그곳을 찾아가며 동네 구석구석을 훑는다. 자연스레 관광지나 맛집을 다니는 것보다 그 지역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목욕탕은 세상의 소음이 정겹게 들려오는 창이기도 하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그는 “침묵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도, 문득 곁에서 들려오는 주민들의 웅성거림을 마주할 때 목욕탕은 비로소 거대한 ‘동네 사랑방’으로 변하는 것 같아 마냥 즐겁다”고 말한다.
“마을 주민들이 뜨거운 물 속에 나란히 앉아 올해 농사 계획에 대해 얘기하고, 파종할 씨를 나눠주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주민들의 소소한 농담이 목욕탕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에요.”
김씨는 ‘좋은 목욕탕’을 만드는 일은 주인과 단골이 함께 만들어가는 ‘2인 3각 경기’와도 비슷하다고 말한다. 공간을 일구는 주인의 정성이 손님의 배려와 만날 때 좋은 목욕탕이 완성된다는 의미다.
지역은 다르지만 그가 만난 목욕탕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온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충남 천안의 ‘성환목욕탕’ 노부부가 손님들을 위해 매실차와 생강차를 준비하는 마음은 충남 홍성의 ‘서문탕’에서 뒷자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떠나는 손님의 성숙한 화답과 맞닿아 있었다. 공간을 아끼는 이들의 무언의 약속이 목욕탕의 품격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보이지 않는 온기를 주고받는 목욕탕의 품격을 함께 지켜내려는 이들의 무언의 약속이야말로 마지막까지 기록하고 싶은 목욕탕의 모습입니다.”

목욕탕이 모두가 벌거벗고 만나는 평등한 곳이라고들 하지만 김씨는 그 속에서 오히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선명하게 체감하곤 한다. 시설 좋은 고급 아파트 단지의 목욕탕과 달리, 정작 씻을 곳이 마땅치 않은 동네의 소박한 목욕탕들은 수익성을 이유로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탄생한 곳이 전남 장수군의 ‘장수작은목욕탕’ 같은 공공 목욕탕이다. 민간 목욕탕이 떠난 자리를 지자체가 대신 채운 이 작은 공간은 어르신들이 이웃을 만나 안부를 묻는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됐다. 김씨에게 낡은 목욕탕의 폐업이 단순한 영업 종료가 아니라, 기본권과 직결된 인프라의 상실로 다가오기에 이런 공공의 노력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김씨는 오늘도 지도 위에 남겨진 굴뚝 표시를 따라 길을 나선다. 그에게 목욕탕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모으는 일이 아니다. 사라져가는 이웃들의 정겨운 풍경을 문장으로나마 붙잡아두려는 소중한 작업이다. 낡은 목욕탕이어도 누군가의 오늘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장소로 오래도록 기억되길 그는 소망한다.
“지역마다 다른 목욕 시설과 사람 냄새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여전히 큽니다. 내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전국 곳곳, 아직 식지 않은 온기를 찾아 나설 생각입니다.”

신지호 기자 p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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