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와 마라도가 수련 잎처럼 뜨는 곳, 제주 송악산 기행

전갑남 2026. 3. 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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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봄 기행 4] 산길과 해안 길이 하나로 만나는 그곳, 절울이 언덕을 걷다

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망설임 끝에 올라선 송악산 길 위에서 제주 참모습과 역사의 이면을 대면하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들리는 절울이의 낮은 숨소리를 통해 삶과 자연이 하나의 결로 이어져 있음을 깨달은 여정이었다. <기자말>

[전갑남 기자]

 송악산의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표지석과 제주의 상징 돌하르방이 탐방객을 맞이한다.
ⓒ 전갑남
제주를 여러 번 오가면서도 늘 "간다 간다" 말만 앞세우고 정작 발길을 들이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송악산이다. 송악산은 바닷물과 마그마가 만나 폭발하며 형성된 수성화산으로, 제주의 여러 오름 중 독특한 형상을 지닌 곳이다. 지질학적 '종합 선물세트'라 불릴 만큼 독보적인 가치를 품고 있지만, 나는 매번 그 이름 앞에서 주춤거렸다.

사실 이름 끝에 붙은 '악(岳)' 자에 못내 겁을 좀 먹었던 탓도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오르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번번이 발길을 붙잡았다. 지도 위 깎아지른 절벽의 형상만 보고는, 송악(松岳)이 내게 허락되지 않은 험산이라 지레 짐작하며 높게만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문을 열어주었다. 인근 용머리해안의 물때를 확인하니 오후 3시경이나 되어야 탐방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바다가 잠시 길을 막아선 그 멈춤의 시간이 오히려 송악산의 속살을 대면하라는 권유처럼 다가왔다. 퇴로 없는 일정 앞에, 비로소 나는 오랫동안 미뤄둔 '악'의 품속으로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고독한 산길에서 마주한 자연과의 독대

사실 송악산은 제주 사람들에게 '절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절'은 파도를 뜻하고 '울이'는 울음을 뜻하니, 직역하면 '파도가 우는 산'이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마치 산이 울부짖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금빛으로 물든 억새밭이 여정의 끝자락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 전갑남
너울성 파도가 기승을 부리는 날엔 그 울음소리가 더욱 깊어질 터였다. 나는 그 옛 이름을 마음속으로 굴리며, 파도와 역사의 울음이 켜켜이 쌓인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재 송악산은 오름의 생태 회복을 위해 일부 구간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정상 분화구를 볼 수 있는 탐방 코스는 열려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편안한 둘레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곁을 지키던 아내가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 건넸다.

"난 편한 해안 길로 갈 테니 당신 혼자 다녀오구려. 딴 길로 들지 않게 조심하고."
"이 사람, 산길은 결국 다 만나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말라구."

막상 산길에 접어드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둘레길의 시끌벅적한 인파 소리가 멀어질수록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과 바스락거리는 마른 풀잎 소리가 선명해졌다. 혼자라는 두려움은 곧 자연과 독대하는 설렘으로 변해갔다.

수평선 위 수련 잎처럼 뜬 섬들, 가파도와 마라도

드디어 시야가 수직으로 터지며 정상에 올라섰다. 가쁜 숨도 잠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세상에 이런 뷰가. 혼자 보기 아깝네!"
 깊게 패인 송악산 분화구 전경. 육안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거대한 분화구에서 태고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찔한 깊이감이 전해진다.
ⓒ 전갑남
발밑으로는 거대한 깔때기 모양의 분화구가 검붉은 속살을 드러낸 채 깊게 패어 있었다. 2중 분화구라는데 육안으로는 그 겹쳐진 결이 다 보이진 않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화구의 깊이감만큼은 아찔했다. 마치 대지가 거대한 숨을 몰아쉬는 입구처럼 느껴졌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초록의 식생을 품고 있는 그 웅장한 구덩이 위로 제주의 거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코앞에는 거대한 조각품 같은 산방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섰고, 그 너머로 영험한 한라산 능선이 길게 이어진다.
ⓒ 전갑남
발아래 짙푸른 바다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제주의 비경들이 파노라마처럼 감겨왔다. 코앞에는 거대한 조각품 같은 산방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섰고, 그 곁으로 기묘한 형상의 단산이 호위하듯 자리했다. 산방산 왼쪽으로는 유려한 곡선의 사계해안이, 오른쪽으로는 바다로 헤엄쳐 나가는 용머리해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수평선 위로는 나지막한 평지의 가파도가 마치 바다 위에 띄워놓은 수련 잎처럼 떠 있었다. 그 풍경이 어찌나 정갈하고 소중한지! 마치 누군가 귀한 보석을 푸른 비단 위에 받쳐 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또 가파도 너머 국토 최남단 마라도는 망망대해를 홀로 견뎌내는 듯하면서도, 제주의 품을 지키는 막내처럼 애틋하고 대견했다. 파란 바다 위에 점처럼 찍힌 두 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간 세상에서 부대끼며 쌓인 마음의 찌꺼기들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송악산에 보이는 가파도, 마라도. 푸른 비단 같은 바다 위에 정갈하게 떠 있는 가파도와 마라도의 전경이 평화롭다
ⓒ 전갑남
'끝은 곧 시작'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마라도 짜장면 한 그릇의 추억이 새롭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마침 바다를 가르며 가파도로 향하는 여객선이 남긴 하얀 물보라는 육지와 섬을 잇는 가느다란 탯줄처럼 보였다.

은빛 윤슬과 억새밭 조랑말의 평화로운 동행

서둘러 내려오니 저 멀리 제1전망대에서 아내가 나를 향해 크게 손짓을 하고 있다. 아내와 다시 손을 맞잡은 곳부터는 부드러운 나무 데크 길이 이어졌다. 해안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굽이치는 길은 몸도 마음도 참 편안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이 빚어낸 해안 절벽과 유려한 곡선의 데크 길이 파란 바다와 조화롭다.
ⓒ 전갑남
바다의 윤슬은 기가 막혔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잘게 부서지는 은빛 파도는 수만 개의 보석을 바다 위에 뿌려놓은 듯 눈부시게 빛났다. 길가 억새밭 사이로 조랑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저 녀석들 주인은 있나?"
"그러게. 저 높은 곳까지 물은 어떻게 가져다 먹일까?"
 세상의 속도와 상관없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풀을 뜯는 조랑말이 송악산의 고요를 완성한다.
ⓒ 전갑남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걷는 길 위로 시간이 멈춘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억새밭 사이로 고개를 숙인 채 오로지 풀 뜯는 소리만 내는 조랑말들의 묵묵한 몸짓, 또 세상의 속도와는 상관없다는 듯 제 자리를 지키는 순한 동행 덕분에 제주 바람마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찬란한 풍경 아래 숨겨진 역사의 아픈 흉터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 하단에는 아픈 역사의 흉터가 숨어 있었다. 해안 절벽 하단에 입을 벌린 시커먼 구멍들, 바로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군이 자폭용 보트를 숨기기 위해 파놓은 진지 동굴들이다.
 아름다운 비경 아래 숨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인 일제강점기 진지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다.
ⓒ 전갑남
조금 전 정상에서 보았던 그 찬란한 비경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짙푸른 바다 위로 윤슬은 눈부시게 빛나는데, 그 아래 박힌 어두운 동굴들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제주의 흉터처럼 보였다. 어쩌면 송악산 옛 이름 '절울이'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강제로 동굴을 파며 신음하던 이들의 통곡이 바다를 타고 흐르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어느덧 약속한 오후 3시. 너울성 파도가 발목을 잡는 바람에 용머리해안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바다는 길을 막는 대신 산방굴사로 우리를 안내했다. 송악산이 보여준 웅장한 기운과 아픈 역사를 가슴에 담고, 이제 우리는 산방산이 흘리는 눈물을 만나러 다시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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