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도 인상도 '독'…외통수 갇힌 한은, 결국 '신중'에 올인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미 기자 =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시계가 안개 속에 갇혔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시장금리의 과도한 상승을 경계하며 향후 6개월 내 금리인상에 선을 그었던 한은은, 이제 중동사태라는 거대한 외부 충격 앞에서 정책 시나리오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중동 사태의 결말이 물가 상승, 경기 둔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한은의 금리 정책의 방향성을 한쪽으로 잡기 어렵게 됐다.
박종우 한국은행 부총재보는 지나 12일 통화신용정책보고서 기자설명회에서 현재 상황을 극도의 불확실성으로 규정하며 향후 금리 결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은의 고심은 박 부총재보의 발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2월 통화정책방향 결정 이후 불과 2주 사이에 정책 여건에 굉장히 큰 변화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중동 사태의 전개 양상에 따라 성장과 물가의 경로가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어, 현시점에서는 어떠한 '기본 시나리오'도 상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불과 보름 전, 한은은 포워드 가이던스를 통해 중기적 관점에서의 금리 경로를 시사한 바 있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지며 당시 제시한 정책의 방향은 시장 참가자들이 나침반으로 쓰기 어렵게 됐다.
지금은 특정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악수를 두지 않기 위해 매일의 데이터를 사후적으로 점검하며 대응하는 '전략적 인내'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중동발 유가 급등과 같은 공급 측 인플레이션 충격은 통화정책의 직접적인 통제 범위에서 벗어난다.
금리는 총수요를 조절하는 도구여서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에 즉각 대응하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박 부총재보는 공급 측 물가 상승 압력이 발생했을 때 "물가의 상승 속도나 레벨보다는 어느 정도 지속되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용 상승 요인이 일시적이지 않고 장기화하여 경제 주체들의 기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거나 다른 상품 및 서비스 가격으로 전이되는 '2차 파급효과'가 가시화될 때 통화정책 차원으로 대응하는 데 따른 실익이 생긴다는 논리다.
실제로 한은은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와 현재 상황에는 차이가 있다고 짚었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위기 극복 과정에서 수요측 압력이 이미 높아진 상태였고, 물가 수준도 목표치를 크게 웃돌아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할 정책적 명분이 뚜렷했다.
한은은 통화정책 역사상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50bp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요측 물가 압력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공급 충격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으로 한은으로서는 당시보다 훨씬 정교하고 절제된 대응이 필요해졌다.
통화정책이라는 '무딘 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한은은 결국 최선의 경로보다는 '신중한' 행보를 선택한 셈이다.
중동 사태 이후 한은의 행보는 금융시장 가격 변수 안정에 집중되고 있다.
지난 9일 국고채 단순 매입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는 급등세 속에 3년물 국고채 금리가 하루 만에 20bp 급등하는 등 채권시장의 급격한 심리 위축이 우려되자 안정화 조치에 나선 것이다.
한은은 이번 설명회에서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힐 때까지 경제 주체들의 심리와 금융시장 안정을 지키는 데 방점을 찍겠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4월 초 예정된 통화정책방향 회의 때까지 한은은 매 순간 변화하는 대외 변수를 점검하며 가장 신중한 선택을 무엇일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시장참가자들도 중동사태가 전개되는 가운데 한은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은행의 한 채권딜러는 "특정방향의 기대를 형성하기보다는 대내외 여건변화를 보고 신중하게 하겠다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다소 매파적인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의 내용을 보고 시장이 놀라워하지 않게 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보고서에서 한은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1%포인트(p) 오를 때 국내 물가가 0.2%p 오를 수 있다는 내용과 수요와 공급, 정책 측면에서 물가 상방압력이 산재해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경기를 가장 크게 좌우할 반도체 업황과 관련해서도 올해까지는 견조한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봤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종가는 배럴당 95.73달러로 전장보다 9.7% 상승했다. circlem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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