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남성복’이라는 장르를 만들다…37년 디자이너의 ‘굿 굿바이’ [더 하이엔드]

이도은 2026. 3. 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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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의 세월과 70여 회의 컬렉션. 이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만든 에르메스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Véronique Nichanian·71)이 지난달 18일 일본 도쿄에서 마지막 패션쇼를 선보였다. 지난해 10월 열린 파리패션위크 가을·겨울 컬렉션을 새롭게 연출한 ‘브리지 오브 라이트(Bridge of Light)’ 이벤트로, 장대한 시간을 응축한 고별 무대가 펼쳐졌다. 도쿄=이도은 기자 lee.doeun@joongang.co.kr


베로니크 니샤니앙, 도쿄서 고별 무대


놀랍고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행사장은 다름 아닌 고속도로 한복판.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오후 6시, 도쿄 긴자를 지나는 고속도로(KK선) 구간에는 퇴근길 차량 대신 런웨이와 애프터 파티장이 들어섰다. 폐선된 철로를 공원으로 바꾼 뉴욕 하이라인처럼, 조만간 시민 쉼터가 되기 위해 비워 둔 도로가 특별 이벤트장이 됐다.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은 남달랐다. 네온사인 파노라마 속에 유리 파사드로 빛나는 에르메스의 긴자 플래그십 스토어가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도쿄 긴자를 지나는 고속도로에서 '브리지 오브 라이트' 쇼가 펼쳐졌다. ⓒNacása & Partners

이번 행사는 장소도 장소지만 특히 니샤니앙의 ‘진짜 마지막’ 쇼라는 점 때문에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에르메스는 크루즈 컬렉션, 공방 컬렉션 등이 있는 여타 브랜드와 달리 공식 컬렉션을 파리 외 도시에서 새롭게 연출하는 패션쇼를 진행한다. 그래서 파리에 이어 또 한 번의 컬렉션이 더 남았던 셈. 니샤니앙은 그 의미 있는 장소로 도쿄를 낙점했다.
여기엔 일본과의 각별한 인연이 작용했다. 그는 에르메스에 입성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이탈리아 남성복 체루티의 라이선스 업무를 하며 일본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도쿄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찾곤 했다. 무엇보다 에르메스 일본 내 매장 수만 34개(면세점 제외). 특히 남성복에서 일본 시장의 입지는 최상위권이다.

이날 고속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흡사 우주 도시의 터널 같은 런웨이에는 총 58명이 등장했다. 전문 모델이 나오는 공식 패션위크와는 달리 개성 넘치는 퍼스널리티가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 배우 카사마츠 쇼, 이치카와 단코, 마미야 쇼타로, 마츠자카 토리, 배우 겸 프로듀서인 사이토 타쿠미,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 , 피아니스트 스미노 하야토, 발레리노 쿠리야마 렌, 요리사 고바야시 케이, 그리고 영화감독 이상일이 포함됐다. 또 여느 쇼와 달리 에르메스 브랜드 관계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남성 실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프 과노, 호라이즌(비스포크 제품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악셀 드 보포르, 일본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카메이 세이치와 스토어 디렉터인 오사토 히토시가 런웨이를 걸었다.


조용한 럭셔리, 이기적 디테일


58개 착장의 컬렉션은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그리고 니샤니앙이 구축한 진정한 럭셔리를 그대로 보여줬다. 드러내지 않는 절제, 소재의 혁신,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연속성으로 요약되는 무대였다.
크로커다일 가죽 소재 코트와 실크 스웨터 ⓒKo Tsuchiya
램스킨과 캐시미어 소재를 섞은 체크 스웨트셔츠 ⓒKo Tsuchiya
1991년 컬렉션에서 소환된 카프스킨 소재 점프수트 ⓒKo Tsuchiya
런웨이에 선 퍼스낼리티. 영화감독 이상일 ⓒKo Tsuchiya
피아니스트 스미노 하야토 ⓒKo Tsuchiya
퍼스낼리티로 참여한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 ⓒKo Tsuchiya
언제나 그렇듯, 노골적인 로고 없이도 에르메스임을 알 수 있는 ‘조용한 럭셔리’가 재현됐다. 과장된 실루엣이나 극적인 장식도 없었다. 블루종, 트레블 코트,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 등 남성복의 기본 아이템을 내세우며 직선적 구조와 여유로운 곡선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점을 찾아냈다. 특히 검은색 크로커다일 가죽에 같은 색 실크 팬츠와 스웨터를 조합한 착장은 오직 구조·선·소재로만 존재했다. 설명이나 과시가 불필요한 자신감 그 자체였다.

니샤니앙이 종종 강조해 오던, 오직 입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기적 디테일’도 여전했다. 가령 두 개의 바늘과 하나의 실을 사용하여 꿰매는 에르메스만의 가죽 공법, 주머니 안감이나 외투 깃 안쪽에 쓴 부드러운 램스킨은 ‘은밀한 사치’ 그 자체였다. 여기에 깊이 있는 그레이·토프·커피·블루가 컬렉션 전반에 차분한 바탕색이 되면서 오렌지·핑크 등 포인트 컬러를 부각하는 조연이 됐다.

니샤니앙은 마지막 컬렉션까지 본인만의 장기를 충실히 보여줬다. 바로 남다른 소재의 발굴과 조합이었다. “색깔뿐 아니라 소재 자체가 나의 언어”라고 자부할 만큼(‘비즈니스 오브 패션’ 인터뷰), 그는 원단·소재·가죽에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요즘처럼 온라인 쇼핑과 소셜미디어(SNS) 시대에 인정받기 어려운 도전이지만, 니샤니앙은 이번 컬렉션에서도 또 한 번 혁신가를 자처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니트지만 캐시미어에 가죽을 덧댄다거나 부드럽고 가벼운 양면 가죽으로 블루종 점퍼를 만드는 식이다. 또 사슴 가죽 안과 밖 모두 활용한 코트나, 깎은 양털 가죽에 캔버스 안감을 더한 후드 파카를 선보였다.

시선을 이끈 디테일. 디어스킨 소재의 코트 ⓒKoji Shimamura
카프스킨 소재의 스트라이프 수트 ⓒKoji Shimamura
80년대 붐박스를 본뜬 가죽 가방 ⓒKoji Shimamura
또 이번 런웨이에선 과거 자신의 아카이브를 소환하는 착장이 특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좋은 옷에는 유통기한이 없다는 그의 철학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1991년부터 2018년까지, 10벌의 과거 컬렉션이 세월을 거슬러 등장했다.
바이커 가죽 점프수트(1991), 디어스킨 소재의 코트(2001), 카프스킨 소재의 가는 줄무늬 정장(2003), 카프스킨과 시어링 소재의 봄버 재킷(2004) 등이다. 심지어 1980년대 후반 붐 박스를 본뜬 가죽 조각 여행 가방도 런웨이에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동어 반복이나 추억의 모티브가 아니었다. 시간이 옷을 더 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더해준다는 역설적 증명이었다. 쇼 전체가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이어가며 행사 제목 그대로 '다리'의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행사의 피날레 장면. 절제된 선과 컬러와 대비되는 소재의 혁신이 돋보였다. ⓒKaito Chiba


액세서리에 어울리는 남성복 구축


모든 모델이 무대로 나와 일렬로 행진하는 피날레가 끝나자 빨간 가죽점퍼를 입은 니샤니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처럼 환한 웃음으로 런웨이에 나서자 앉아 있던 모든 참석자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한 브랜드에서 청춘과 전성기를 보내고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디자인 거장에 대한 존경이었다.
잠시 후 런웨이 한가운데 악셀 뒤마 에르메스 회장과 아리가 마사오 일본 지사장이 니샤니앙과 나란히 섰다. 뒤마 회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마지막 무대였다”면서 디자이너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금 피력했다. 이들의 따뜻한 인사에 니샤니앙은 담담한 표정에도 연신 눈물을 훔쳤다. 지난해 파리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는 니샤니앙의 모습. ⓒKoji Shimamura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장으로 향하는 야외 공간에는 수년간 디자이너의 피날레 인사 영상이 반복 재생됐다. 최근 그는 패션 전문지 ‘비즈니스 오브 패션’과의 인터뷰를 통해 “에르메스 가죽 제품과 남성 실크 분야의 디렉션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계획을 밝혔지만, 공식적인 굿바이 인사라는 게 실감 나는 광경이었다.

니샤니앙의 37년은 칼 라거펠트가 펜디에서 54년을 보낸 것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디자이너 중엔 최고(最古)다. 업계에서는 니샤니앙이 ‘에르메스 남성복’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가 합류하기 전 에르메스의 남성복은 타이와 가방, 그리고 소소한 컬렉션이 있던 수준이었다. 그는 액세서리와 어울리는 옷, '베트망 오브제(Vêtements objets, 불어로 옷이라는 사물)'의 컨셉트를 내세우며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가방·벨트·스카프 등과의 조화로운 패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절제된 라인, 색을 더한 포인트, 핀 스트라이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 쓴 디테일은 로고를 넘어서는 그만의 시그너처가 됐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인터뷰에서 에르메스와 첫 만남을 종종 회고했다. 1988년 에르메스 창립자 가문의 5대손이자 당시 CEO였던 장 루이 뒤마(1938-2010)가 “에르메스를 당신 기업처럼 운영해 봐라”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었다는 스토리였다. 과시하지 않고, 새로운 혁신을 꿈꾸며, 유행과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 낸 에르메스 남성복이라는 장르는 그 37년 전 약속에서 시작된 셈이다.


후임은 런던 출신 웨일스 보너


니샤니앙의 뒤를 잇는 인물은 영국 출신 디자이너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Grace Wales Bonner·36)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 ‘웨일스 보너’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10년간 활동하며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남성복을 추구해 왔다. 2014년 런던 패션 스쿨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직후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후 아디다스·디올 등과의 협업을 통해 클래식과 스트리트, 전통성과 실험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2021년에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협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국제 남성복 디자이너’상을, 2024년에는 영국 패션어워즈에서 ‘영국 올해의 남성복 디자이너’상을 받은 바 있다. 그가 선보일 첫 컬렉션은 2027년 1월로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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