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역사를 이끈 여성'... 숭고했던 할머니의 삶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3. 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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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역사를 움직인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김종성 기자]

미국 '여성 역사의 달'인 3월을 맞아 미국 시각 6일 자 <뉴욕타임스>가 역사적 여성 인물 104명을 선정했다. 그 속에 유관순 열사와 더불어 고 길원옥 할머니가 포함됐다. 이 사실은 한국 시각 10일 자 보도들을 통해 국내에 많이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열두 살 때 위안부 피해를 입은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쟁범죄를 증언하고 일본의 사과를 촉구한 일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이자 위안부 운동가였다. 미국 언론이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가 포함된 한국 위안부 운동가들의 투쟁이 세상을 크게 움직였음을 증명한다.

유관순으로 대표되는 한국 여성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일제를 당황시켜 식민정책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또 일본을 비롯한 당대의 제국주의국가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의 제국주의 청산 노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길원옥이 김학순·김복동·이용순 등과 함께 벌인 투쟁은 일본의 군국주의 행보를 제약하는 한편, 세계 인류가 여성 인권을 매개로 세상을 변모시키는 기능도 발휘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세워지는 소녀상은 이들의 승리를 알리는 기념비의 기능도 한다. 그는 제국주의의 유산에 맞서 싸우며 승리를 거둔 한국 여성들 중 하나다.

길원옥의 증언
 2017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 음반 제작발표회에서 길원옥 할머니의 모습.
ⓒ 연합뉴스
1928년(주민등록상으로는 1927년)에 출생해 일제강점기 막판에 10대 초반이었던 길원옥이 위안부 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일흔 살 때다. 1998년에 그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 사무실을 찾아갔다. 윤미향 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윤미향과 나비의 꿈>에서 그때의 길원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나온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모습을 본 것이 계기였다. '정작 신고해야 할 나는 이렇게 숨어 있는데···' 하며 당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곁에서 며느리가 듣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수양자식들 앞에서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찾아왔다."

'정작 신고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중얼거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평안북도 희천군 출신인 그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압록강 너머로 위안부 강제동원을 당했다. 1940년에는 헤이룽장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랬다가 이듬해쯤 방출됐다. 그곳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가 2016년에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 길원옥 편에 이런 설명이 있다.

"만 열두 살의 나이에 누군가를 따라 만주의 위안소를 다녀온 소녀에게 각인되는 뚜렷한 사실은 어린 나이에 위안소에 갔다가 성병을 얻어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길원옥은 '15세 안쪽에 (몸이) 다 된 거지' 하면서 이때 자신의 삶이 거의 결정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성병으로 허벅지 안쪽에 임파선이 붓는 증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길원옥은 더 이상 위안부 생활을 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온다."

열세 살 무렵인 1941년경 풀려난 그는 산에서 땔감을 줍거나 평양 무기공장에서 총 닦는 등의 일을 하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취업 사기에 속아 평양발 국제열차에 올라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베이징 쪽인 허베이성의 위안소였다.

두 번이나 강제연행된 그는 '15세도 되기 전에 몸이 다 됐다'는 한숨 섞인 자조가 나올 정도로 신체적 공격을 많이 받았다. <윤미향과 나비의 꿈>은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소 후유증으로 귀국 후에 자궁도 절제해야 했고 쓸개도 제거했다"라며 "첫째날 밤 술에 취해 들어와 강제로 옷을 벗기려던 일본군 장교의 손길을 거부하다가 칼집으로 맞은 머리는 평생 할머니를 괴롭히는 두통이 되었다"라고 알려준다.

여성부가 2002년에 펴낸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집>에서 머리 흉터에 관한 진술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 책 길원옥 편은 그의 증언을 이렇게 정리했다.

"(정수리 부분의 흉터를 보여주며) 이거는 일본 군도(로 난 상처). 빼지 않고 그냥 내리쳤으니까 그렇지. 빼가지구 쳤으면 죽었을 텐데···. 시방까지도 이렇게 흉터가 크니. 옷이 피에 젖어서 뱃겨내지를 못하고 찢어냈다니까."

일제 치하에서 그런 고통을 겪고도 마치 중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지난날을 숨기고 살았던 길원옥은 1998년에 용기를 얻어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냈다. 그런 뒤, 피해자에서 운동가로 전격 변신했다. 이것은 그의 반격이었다. 이제 그는 공격자가 됐고 일본은 수비자가 됐다.

<윤미향과 나비의 꿈>은 "뒤늦은 합류였지만, 할머니는 마치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라도 할 것처럼 열심히 뛰어다니셨다"라며 "매주 수요일이면 빼놓지 않고 수요시위에 나왔고, 유럽의회와 호주·미국·캐나다·독일·일본 등 세계 각지로 다녔다"고 기술한다.

해방 뒤 귀국선을 타고 인천항으로 입국했다가 고향 갈 여비를 만들던 중에 38도선을 넘지 못하게 된 그는 남한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술집 직원으로도 일하고 만물상과 노점상 같은 장사도 했다.

인생을 바쳐 일제 전쟁범죄 고발한 길원옥
 2019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1400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세월호 유가족 권미화씨가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에게 땀을 닦을 손수건을 건내고 있다.
ⓒ 이희훈
그렇게 생계를 유지했던 길원옥은 단순히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따뜻한 인류애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대일 반격을 전개했다. <윤미향과 나비의 꿈>은 이렇게 설명한다.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외에도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사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였다가 늙고 병든 할머니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분들을 위해 매달 조금씩 후원금을 보냈다. 통일되면 고향에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모았던 둔을 북녘 고향의 한 유치원에 '콩우유 기계 제작비'로 선뜻 내놓기도 했다. 그렇게 고향의 손주들을 당신 마음에 품었다. 또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의 손을 잡고 후원하며 '포기하지 말고 굳세게 이겨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유럽의회와 호주·미국·캐나다·독일·일본 등을 누비며 일제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활동은 그가 외국 피해자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위 책의 설명이다.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 활동을 하면서 아프리카 콩고내전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향해서는 '베트남 여성들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으니 이제 높아질 일만 남았다'라며 그 여성들의 아픔을 할머니의 삶에 녹여냈다."

길원옥이 피해자 및 운동가들과 함께 벌인 이 운동은 위안부 문제가 한국을 떠나 전 세계의 이슈가 되는 데 이바지했다. 또 군국주의로 치닫는 오늘날의 일본을 견제하는 논리를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군사대국화를 추진 중인 일본 정부가 지금도 항상 걸림돌로 의식하는 것은 강제징용과 더불어 위안부 그리고 소녀상이다.

길원옥은 세계 인류가 제국주의 피해를 극복하고 이를 청산하는 운동에 자신의 경험과 후반부 인생을 바쳤다. <뉴욕타임스>가 그를 역사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안부 운동가로 활동할 때인 2017년에 <길원옥의 평화>라는 음반을 발매하며 가수로도 데뷔했던 그는 지난해 2월 16일 향년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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