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다시 짓고 2년... 하자 없는 집에서 결심한 일

이창희 2026. 3. 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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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에 대한 기대... 고향의 들판들과 함께하는 인생의 후반부를 계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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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기자]

나는 지난 2023년 시골집을 다시 지었고, 이제 새로 지어진 집에서 계절을 두 번씩 보냈다. 두 번째 봄을 맞이하는 2026년 3월, 고향 집을 짓고 난 후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관련 시리즈 기사 : 고향집 다시 짓기]

아빠가 지었던 집

원래 아빠의 집이 지어지기 전에는, 그 자리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지내시던 작은 초가집이 있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명절 때만 가끔 들렀던 집은 작았고, 어두웠고, 마루 밑에는 수확한 생강을 보관할 수 있도록 작은 굴도 있었다. 방 하나에 아궁이가 있는 별도의 부엌이 있었던 작은 집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할머니 혼자 지내셨다.

할머니 혼자 지내시는 게 내내 마음에 걸리셨을 장남은, 당신의 아이들을 모두 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보내고 난 후 큰 결심을 하셨다. 우리에겐 고향 집이었던 면 소재지의 짓다 만 한옥을 뒤로하고, 할머니를 모시러 고향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아마, 면 소재지의 집은 작은 외삼촌이 엄마께 빌려주셨던 집이니, 마음이 계속 무거우셨을 게다.

"애들 다 고등학교로 떠나고 나면, 고향으로 가겠소."

엄마는 외가와 가까운 면 소재지가 익숙하셨겠지만, 아빠의 오래 묵은 고집은 이길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면 소재지의 한옥을 떠났고, 아빠는 오래된 결심을 실행에 옮기신다. 하지만, 뻔한 살림에 아이 넷을 키우느라, 모아놓은 자금이 있었을 리 없고, 집 짓기의 비용은 외삼촌이 시골로 들어가는 막냇동생인 엄마에게 주신 3천만 원이 전부였다.

90년대 중반이니 지금과 가치 비교를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넉넉한 예산은 아니었을 테고, 아빠는 고향 동네의 아는 건축업자에게 가진 예산안에서 맞춰서 지어달라며 부탁을 하셨다.

"자, (가진 돈이) 이것뿐이요. 이걸로 저 앞집이랑 똑같이만 지어 주소."

아빠의 집짓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설계에 대한 고민은 덜었을지 몰라도, 아빠의 무거운 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어느덧 당시 아빠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 쉰을 갓 넘긴 아빠를 상상해 본다. 친정의 돈으로, 할머니의 집을 짓는 장남의 속내가, 나는 너무도 복잡하여 넘겨짚기 쉽지 않다.

아빠의 집은 빠듯한 예산만큼이나 성큼성큼 지어졌다. 오래된 초가집을 부수고, 콘크리트로 바닥을 다지고는, 몇 날 며칠을 물을 뿌려대던 아빠가 떠오른다. 계속 바라고 계셨겠지. 튼튼한 집이 되어달라고, 오래된 초가집보다는 더 바람도 비도, 햇살도 막아달라고. 그렇게 가족들이 모이는 집이 되어달라고.

평생 가난했던 집안의 장남은, 당신 인생 처음 갖는 집이 지어지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빛나게 여기셨을 테니, 나는 그날의 아빠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대했어야 한다. 면 소재지의 아늑한 '우리 집'을 떠나서, 이렇게 더 먼 시골로 왜 들어오는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릴 것이 아니라.
▲ 2021년 12월의 고향집 고향집에 노을이 내려앉는 장면이다. 아빠의 집은 나의 든든한 고향이었다.
ⓒ 이창희
그렇게 다시 지어진 고향집은 농가주택의 기본 설계에 따른 스물다섯 평의 작은 집이었다. 남향의 전면에는 거실과 안방이 있고, 뒤편의 서쪽으로는 부엌이, 그 옆으로는 할머니의 방과 손님을 위한 방이 있었다. 특이하다면 현관 옆으로 욕실이 있어서, 화장실을 쓰려면 거실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형태였다.

초가지붕에 아궁이까지 있던 것보다는 문명의 도움을 조금은 더 받은 아늑한 양옥이었고, 할머니도 얼마간은 아빠를 다그치지 않으셨다.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집을 떠나 있어서 많은 것들이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나는 새로 지어진 아빠의 집이 좋았다.

아빠가 좋아하시니 좋았고, 부모님이 살뜰하게 챙겨주시는 공간이니 더 좋았다. 그렇게 아빠의 집은 우리의 시간을 품으며 함께 나이 들어갔다. 그렇게 성큼성큼 지어진 아빠의 집은, 우리들이 타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각자의 자리를 잡을 때까지 우리의 든든한 고향이었다. <고향집 다시짓기>를 통해 연재했던 그 집 얘기다.

내가 다시 지은 집

집도 이젠 나이를 먹었고, 2014년부터는 엄마 혼자 그곳에 남겨졌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떠난 고향은 이제 다시 돌아올 날들을 기대할 만큼 시간이 흘러버렸고, 우리 4형제는 열셋의 대가족이 되었다. 나는 혼자 남아계신 엄마를 위해서,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서, 무엇보다 다시 돌아올 나의 고향을 위해서, 그 집을 다시 지었다.
▲ 고향의 새집에 눈이 쌓였다. 2025년 1월, 새 집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겨울이다. 눈쌓인 풍경과 어울리는 집이라 좋다.
ⓒ 이창희
3대를 거쳐 지냈던 고향의 집은, 작은 초가집에서 조적식 농가주택으로, 그리고 2024년 5월 2층의 철근콘크리트 주택으로 다시 태어났다. 집이 지어지고 나서, 급하게 마무리 기사를 써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집이 견뎌야 하는 24개월을 잘 보내고 나서 쓰고 싶었다. 물론, 그 2년에 별 탈이 없어야겠지만.
▲ 조카들이 각자의 카메라로 노을을 담는다. 조카들이 놀러왔다. 2층 테라스는 노을을 보기에도 일출을 보기에도 딱 좋은 장소인데, 아이들도 단번에 찾아냈다.
ⓒ 이창희
결과적으로 '하자 없는' 24개월을 보냈고, 다시 따스한 봄이 오고 있다. 새집은 어디 비 새는 곳, 바람 들이치는 곳 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조카들은 예전보다 덜 불편해진 고향 집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고, 우리 네 형제들도 새집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이 집의 주인장인 엄마도 마찬가지이고. 처음엔 혼자 계시는 공간이 익숙하지 않아 '겁난다'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든 편하다 하신다. 앗, 2층 계단을 오르는 건 여전히 싫어하시지만.
집을 짓겠다 결심한 나로서는, 새집에서의 시간들이 너무 뿌듯하다. 뭔가 해냈다는 자부심도 있고, 그 공간에서 함께 채워가는 시간들이 더 순탄해진 느낌도 든다. 조카들도 여름엔 덜 덥고, 겨울엔 덜 추운 할머니의 새집에 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것도 같으니, 이 모든 사건의 주동자로서는 더없이 뿌듯한 결과이다. 덕분에 나도 점점 고향에서 무언가를 해볼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한 불안감마저도 희석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고 있는 듯도 하다.
▲ 잔디한 번 깎았다고, 녹초가 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잔디를 깎았다. 엄마한테 고집을 부려서 잔디를 깔았으니, 이건 내 몫이다.
ⓒ 이창희
지난 2년 동안, 아빠가 심어놓으셨던 나무들은 집 주변으로 재배치되어 우리와의 시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집 뒤편으로는 과일나무도 몇 그루 심었는데, 그들도 아빠의 나무들처럼 무럭무럭 자라나서, 조카들의 추억 안에 함께했으면 좋겠다. 잔디로 채워진 정원에는 개구리들도 풀벌레들도 잔뜩이고, 잠깐 시기를 놓치면 웃자란 잔디들을 깎아내느라 한여름의 더위를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지만, 잔디밭을 고집한 것도 나였으니 내가 감내해야 하는 몫이다.
2026년의 나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집도 늙지 않고 지어봤으니, 욕심이 자꾸 생기는 모양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낸 인생의 전반부가 고향을 떠나고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었다면, 지금부터 기대하는 인생의 후반부는 고향의 들판들과 함께하는 삶이길 바란다. 새로 지어진 고향집 주변에, 고향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은 책방을 지어볼 기대감으로 3월을 맞이했다.
▲ 새해맞이 세배 엄마는 조카들에게 줄 봉투를 정성껏 준비했다, 건강하게 잘 자라라 꾹꾹 눌러쓰시면서. 조카들도 이 곳에서의 시간이 행복하면 좋겠다.
ⓒ 이창희
평생을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행운이겠지만, 나에겐 가족들의 시간을 기억하는 고향의 땅에서 새로 시작될 내 삶에도 응원을 보내고 싶다. 마침, 새 정부가 지방을 살리겠다고 하지 않나? 나도 기꺼이 동참해 볼 생각이다. 누구나 꿈꾸는 '하자 없는 고향집'도 다시 지었는데, 뭘 못할까?

"고향을 떠나 이만큼 버텼으니, 이제 돌아가겠소."

아빠가 40년 전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내게 돌아왔다.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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