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든 ‘램마겟돈’...No Problem?
세계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초강세장을 질주한다. AI 학습을 넘어 추론 시장이 확대되면서 서버 D램과 DDR5, 모바일 LPDDR 등 범용 메모리 수요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메모리 가격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치솟자 글로벌 빅테크들은 사활을 건 물량 확보 경쟁을 벌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 실적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한국 수출 역시 반도체 호황에 올라탔다. 메모리 칩 시장에서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램마겟돈(RAMmageddon)’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반도체 랠리를 과거와 다른 ‘슈퍼사이클’로 보는 시각이 많다. 다만, 반도체 산업 특유의 수요예측 불확실성과 긴 설비투자 리드타임을 고려하면 지금의 초호황이 돌발 변수로 흔들릴 수 있다는 신중론도 있다. 역사적으로 반도체 호황은 뜻밖의 변수로 급격한 변동성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무서운 질주를 벌이는 반도체 ‘램마겟돈’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낙관론 정점 찍을 때를 조심하라?
우리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하이퍼 불(Hyper Bull·초강세장)’을 구가 중인 가운데 역대급 랠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관심이 쏠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매출·영업이익 모두 최고 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운다. 인공지능(AI) 등 산업 구조 변화에 따른 강세장으로 실적이 폭발적으로 개선됐다는 진단이다. 골드러시에 빗대 ‘AI러시’에서도 ‘곡괭이와 삽(반도체)’을 파는 업체가 최종 승자라는 평가도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품귀 현상에 가격이 치솟자 ‘종말’ ‘멸종’을 뜻하는 아마겟돈을 합쳐 ‘램마겟돈(RAMmageddon)’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반도체 시장 수요예측이 난제라는 점에 비춰 자칫 과거처럼 돌발 변수로 가격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반도체 호황에 올라탄 우리나라 수출은 매월 역대 최대 실적을 새로 쓰고 있다. 지난해 6월 동월 기준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운 뒤 9개월 연속 월 기준 신기록 행진이다. 정부 등에 따르면, 지난 2월 수출은 1년 전보다 29% 증가한 674억5000만달러로 집계됐다. 설 연휴로 조업 일수가 전년 대비 3일 줄었음에도 2월 기준 역대 최대치다. 조업 일수를 고려한 일평균 수출은 49.3% 증가한 35억5000만달러다. 일평균 수출이 30억달러를 넘어선 것도 사상 처음이다. ‘슈퍼사이클’을 맞은 반도체가 전체 수출을 견인했다. 지난 2월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약 160% 급증한 251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현재로서는 반도체 초호황 이후에 대한 우려는 거의 읽히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업황을 판가름할 지표로 ▲메모리 고정거래가격(기업 간 대량 거래) ▲빅테크 설비투자 가이드라인 ▲재고자산 회전율 등을 꼽는다. 현재로선 이런 지표 가운데 경고음은 일절 관찰되지 않는다. 시장조사 업체 가트너는 올해 D램과 SSD 가격이 전년 대비 약 130% 상승할 것으로 봤다.
낙관론 배경으로는 반도체 산업 구조 변화가 지목된다.
무엇보다 ‘학습(Training)’에서 ‘추론(Inference)’으로 AI 수요 구조가 변화하면서 메모리 칩 저변이 확대됐다. 학습을 위한 반도체 칩 수요가 AI 시장을 주도할 때는 HBM처럼 특정 고부가 제품에 수요가 집중됐다. AI 추론을 위해서는 서버 D램, 고용량 DDR5, 모바일 LPDDR 등이 필요해 수요 저변이 확대됐다. 특히, AI 추론은 메모리 접근 속도와 동시 처리 능력이 성능을 좌우한다. 대규모 추론 서비스에서는 한 서버가 동시에 수천 건의 요청을 처리한다. 이 때문에 서버 D램과 고용량 DDR5를 통해 충분한 메모리 공간과 대역폭을 확보하지 않으면 지연(latency)이 급격히 늘어난다. 결국 범용 D램이 추론 인프라 기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PC·차량 등 ‘온디바이스 AI’ 확산으로 전력 효율과 저지연이 핵심인 모바일 LPDDR 수요도 급증했다.
이런 수요 구조 변화로 글로벌 IB UBS는 올 들어 미국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의 범용 D램 매출총이익률(매출액에서 매출원가를 뺀 뒤 이를 매출액으로 나눈 수치)이 HBM을 크게 앞설 것으로 봤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고객사와 장기 공급 계약을 하지 않으려 해 애간장을 태운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하루가 다르게 D램 값이 뛰어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가격이 급등하면서 과거 연간 단위로 체결되던 공급 계약도 분기 단위로 바뀌고 있으며 최근에는 월 단위 조정까지 거론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AI 반도체 경쟁이 기판·전원·스토리지 등 주변부로 확장되면서 ‘넥스트 HBM’이라 불리는 신기술도 주목받는다. AI 서버 한 대에 약 2만8000개가 들어가는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는 전류를 안정화하는 핵심 부품이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고사양 제품 중심으로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AI 가속기 전력 소비 증가로 패키징 기판 FC-BGA 중요성도 조명받는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서버용 FC-BGA를 핵심 성장 동력으로 삼고 생산 확대에 나선다. 낸드를 적층해 대용량 데이터를 저장하는 HBF와 미세 회로 구현에 유리한 유리기판까지 등장하면서 HBM 이후 차세대 반도체 경쟁 축이 AI 인프라 부품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설비투자 긴 리드타임
결국 반도체 업황 전망을 종합하면 2026년은 호황이 지속되고 2027년에는 기울기가 다소 조정되더라도 호황이 이어질 수 있지만, 2028년부터는 속단하기 힘들다는 진단이다. 다만, 반도체 수요예측 불확실성을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 현재 극단적인 반도체 공급난이 초래된 것을 달리 보면, 삼성과 SK하이닉스 등이 수요예측에 실패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일률적인 반도체 경기 전망을 힘들게 하는 원인으로 시장에서는 ‘채찍 효과(Bullwhip)’를 지목한다. ‘채찍 효과’는 채찍을 쓸 때 손잡이 부분에 작은 힘만 가해져도 끝부분에서는 큰 파동이 생기는 현상에 빗댄 용어다. 공급망관리(SCM) 분야에서 주로 쓰인다. 공급망에 있어 소비자 수요의 작은 변동이 공급 단계를 거쳐 제조 업체에 전달될 때 단계마다 정보 왜곡이 생겨 수요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 불황 국면에서 반도체 기업이 막대한 재고자산평가손실을 기록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신중론을 펴는 쪽에서는 반도체 산업 특유의 증설 리드타임(장비 발주 후 입고까지 소요 기간)을 지목한다. 메모리 기업은 현재 가격과 수요 신호를 근거로 미래 생산능력을 확정하지만, 신규 팹(Fab·공장) 건설부터 장비 반입, 공정 안정화까지는 통상 1~2년 이상 소요된다.
문제는 이 사이에 실제 수요 환경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호황기에 가격 상승과 주문 증가를 보고 설비투자를 확대하지만, 생산능력이 본격 가동될 시점에는 수요가 둔화해 공급 과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불황기 때 투자를 줄이면 이후 수요 회복 국면에서 공급 부족이 빚어질 수 있다. 이처럼 현재 수요 반응보다 실질적인 공급 확대가 늦게 따라오는 ‘지연 효과’로 반도체 산업 경기 진폭이 증폭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배경에서 반도체 장비 업계를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생산 공정별로 업황을 체감하는 시점이 서로 달라 ‘시차 효과’가 뚜렷하다. 설비 증설에 긴 시간이 걸리는 구조 때문에 장비 업체들이 업황 후반부에 뒤늦은 수혜를 누릴 때가 많다. 메모리 가격이 상승하고 수요가 급증해도 반도체 기업은 곧바로 생산능력을 늘릴 수 없어 초기 호황기 땐 기존 설비 가동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가령, 메모리 판매량이 늘면 불량 검사나 패키징을 담당하는 후공정(後工程) 업체들이 낙수효과를 누린다. 기존 설비에서 생산된 칩 물량이 늘어나면 테스트·패키징 물량도 함께 증가한다. 반면, 노광·식각·증착 장비나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전공정(前工程) 소부장 업체는 상황이 다르다. 이들 기업은 반도체 업체들이 신규 설비투자를 결정하고 장비 발주가 이뤄져야 수주를 기대할 수 있다. 신규 팹 건설과 장비 반입까지 통상 1~2년가량 시간이 걸리므로, 슈퍼사이클 초기 전공정 업체들은 뒤늦게 수혜를 누린다. 이런 공정별 시차 때문에 반도체 산업 안에서도 후공정과 전공정 기업 간 실적과 체감 경기가 엇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반도체 산업은 이익의 진폭이 매우 큰 숙명을 안고 있다”며 “반도체 상승 사이클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예단할 수 없지만 업황에 대한 낙관론이 정점을 찍을 때 주가는 하락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0호(2026.03.11~03.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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