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돌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제주돌문화공원

전갑남 2026. 3. 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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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봄 여행 3] 설문대할망의 품에서 풀린 삼다도의 수수께끼

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기자말>

[전갑남 기자]

제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삼다도(三多島)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뜻이다. 제주 땅에 발을 내디디면 거친 바람과 현무암의 질감은 즉각 체감되지만, '여자가 많다'는 말은 늘 수수께끼였다. 단순히 인구 통계학적인 의미일까, 아니면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상징이 있는 걸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섬의 형성 과정과 제주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다는 '제주돌문화공원'을 찾았다.

신화와 전설이 마주하는 길 : '전설의 통로'
 신화와 역사가 시작되는 곳, 제주 돌문화공원의 입구에서 여정의 첫발을 떼다.
ⓒ 전갑남
설레는 기대감을 안고 들어선 공원의 입구. 하지만 곧이어 나타난 풍경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여느 공원과는 결이 달랐다. 거대한 바위벽이 양옆을 호위하듯 서 있는 좁고 깊은 길, 바로 전설의 통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통로에 발을 들이는 순간, 현대적인 제주의 풍경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집채만 한 바위들은 태초의 제주가 생성될 당시의 거친 숨소리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현실 세계를 뒤로 하고 거대 여신이 지배하던 신화의 시대로 차원을 이동하는 듯한 묘한 긴장감이 전해졌다.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관람객의 마음을 정화하고 신성한 공간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의례적인 통로였다.

하늘과 맞닿은 찰나, 하늘 연못의 경이로움
 제주의 푸른 하늘이 내려앉은 하늘연못. 그 청명함에 취해 여행자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안는다.
ⓒ 전갑남
좁고 어두운 통로가 끝나는 지점, 갑자기 시야가 터지며 비현실적인 풍경을 마주한다. 박물관 옥상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거대한 물의 광장, '하늘연못'이었다. 한라산 백록담과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죽솥'을 상징한다는 이 연못은 제주의 하늘을 고스란히 바닥에 깔아놓은 듯했다.

그 청명함에 옆에 있던 아내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와, 이거 호수야? 넘실넘실 이렇게 깨끗할 수가!"

인공적인 구조물 위에 고인 물이라기엔 너무나 투명했고, 주변의 숲과 하늘을 거울처럼 비춰내며 자연 일부로 완벽히 동화되어 있었다. 설문대할망의 숭고한 죽음이 서린 이곳에서 우리는 제주의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나는 찰나를 목격했다.

땅의 심장부, 지하 돌 박물관과 설문대할망 전시관

연못의 여운을 뒤로 하고 우리는 홀린 듯 지하 돌 박물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압도한 것은 제주의 탄생 과정을 재현한 거대한 파노라마 영상이었다. 휘몰아치는 불꽃 속에 섬이 솟구치는 장엄한 서사시를 보며 아내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렇게 뜨겁고 격렬하게 태어난 섬이었구나..."

전시실 깊숙이 들어가자 제주의 뼈대를 이루는 각양각색의 화산탄과 용암구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뜨거운 용암이 공중으로 솟구치다 굳어버린 화산탄은 마치 우주에서 온 운석처럼 신비로웠고, 역동적인 흐름을 멈춰 세운 용암 잔해들은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조각품이었다.
 뜨거운 용암이 분출되어 섬이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제주의 기원을 생생하게 전한다.
ⓒ 전갑남
 자연이 빚은 수석뿐만 아니라 인간의 예술적 영감이 더해진 조각상들이 나란히 서서 각기 다른 몸짓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 전갑남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조각품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수석이었다. 어떤 것은 웅크린 짐승을 닮았고, 어떤 것은 고뇌하는 구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이 '지구의 자서전' 앞에서 우리는 자연의 무궁무진한 창의성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어진 설문대할망 전시관에서는 제주의 창조주이자 어머니인 설문대할망의 신화가 예술적으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키가 너무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았다는 거대 여신이 자식들을 위해 솥에 몸을 던졌다는 서사는 제주의 정신적 뿌리였다.

전시실을 가득 채운 기기묘묘한 용암석들은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지구의 속살'이었고, 그 돌들 속에 할망의 넋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다.

백만 평의 대지, 곶자왈의 숨결 속으로

박물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지였다. 마침 지나가는 순환버스를 타려다, 아직 다리 힘이 있으니 직접 걸어보자며 씩씩하게 발걸음을 뗐다.

마치 제주도 모든 돌이 이곳으로 모여든 듯, 길가에 늘어선 수많은 석물(石物)들이 다음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산책로 길가에 세워진 돌하르방들은 세월에 깎여 뭉툭해진 코와 비대칭인 눈매가 오히려 더 정겹고 사람 냄새가 났다.

걷던 중 아내가 거대한 바위 형상 앞에 멈춰 섰다.

"저거 실제 고인돌일까? 강화 고인돌과는 좀 다르네."
 거친 바람을 피해 지면에 낮게 엎드린 제주의 고인돌. 땅의 숨결을 품은 강인함이 느껴진다.
ⓒ 전갑남
강화도에서 많이 보아온 고인돌이 문득 떠올랐다. 강화의 고인돌이 하늘을 향해 위엄 있게 솟아 장중한 기개를 뽐낸다면, 제주의 그것은 섬의 거친 바람을 피하려는 듯 지면에 낮게 엎드린 채 땅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수천 년 세월을 버텨온 강화 고인돌의 꿋꿋한 기상과는 또 다르게, 제주의 고인돌은 모진 풍파 속에서 몸을 낮추어 생명을 지켜온 제주 사람들의 삶처럼 투박하고도 단단했다.

신화의 부활, 오백장군과 설문대할망의 품
 하늘을 향해 솟은 거대한 바위들이 마치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굳어버린 아들들처럼 서 있다.
ⓒ 전갑남
 붉은 동백꽃이 떨어진 마당과 초가집. 제주 삶 속에서도 피어난 따스한 서정이 느껴진다.
ⓒ 전갑남
정겨운 초가마을을 지나 발길을 옮기던 우리는 돌문화공원의 백미, '오백장군' 군상 앞에 멈춰 서고 말았다. 자식들을 위해 스스로 양식이 된 어머니 설문대할망과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바위가 된 아들들의 비극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곳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돌상들이 줄지어 선 광경을 마주하자 압도적인 형상 너머로 말로 다 못 할 경외감이 차올랐다. 그 비극적인 형상들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니, 수많은 아들 돌들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는 것은 결국 공원 전체를 아우르는 설문대할망의 거대한 품이라는 사실이 절절히 체감되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여운 동자석과 석상들. 투박한 현무암으로 빚어낸 작은 석상들이 마치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정겹게 서 있다.
ⓒ 전갑남
자식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던진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차가운 바위가 된 아들들을 여전히 따스하게 보듬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의 방에서 마주한 따스한 정

여정의 끝자락, 우리는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어머니의 방'에 닿았다. 그곳은 거대한 신화의 위용 대신,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설문대할망의 숭고한 모성애가 나지막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용암동굴의 실루엣을 닮은 그 방에 홀로 놓인 설문대할망의 돌상은 마치 잠든 어머니의 얼굴처럼 평온했다.
 벽면의 그림자가 자식을 품은 어머니의 숭고한 실루엣을 닮아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 전갑남
차갑고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방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그 어느 곳보다 따뜻했다. 처음에 가졌던 '여자가 많다'는 의문의 답을 그곳에서 비로소 찾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의 많음이 아니라, 이 거친 돌밭을 일구고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제주 여인들의 강인함과 따스한 정이었다.

공원을 나서는 길, 발끝에 채이는 작은 돌 하나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돌 속에도, 이 섬의 억만년과 어머니들의 시간이 함께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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