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플라자] 내란 청산 1년

데스크 2026. 3. 1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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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기고
정권 바뀌면 앞선 정부 '0'으로 만들고
자신들만 '1'이 되려…단절의 선언
정치, 미래 설계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해 5월 2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앞 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내란종식'이 쓰여있는 야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뉴시스

대한민국의 권력 교체는 언제부턴가 디지털식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면 앞선 정부를 '0'으로 만들고 자신들만 '1'이 되려 한다.

김영삼의 △신 한국 △김대중의 제2건국 △노무현의 권위주의 청산 △이명박의 선진화 △박근혜의 창조경제 △문재인의 적폐청산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 그리고 지금의 내란 청산까지. 이름은 달랐지만 메시지는 하나였다.

과거는 틀렸고 나만 옳다는 단절의 선언이다.

하지만 국가 경영은 디지털이 아니다. 아날로그다.

앞선 초침이 밀어준 힘으로 분침이 움직이고 시침이 이어진다.

어제의 시간을 지운다고 오늘이 더 빛나지는 않는다.

국가는 시간 위에 쌓여온 역사다.

앞선 정부의 시간 위에 다음 정부가 새로운 층을 더한다.

그래야 국가가 앞으로 나아간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곧 1년이다. 그러나 국정의 중심 언어는 여전히 '내란 청산'이다.

계엄 상황은 분명 헌정사에 있어서는 안 될 시간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볍게 넘길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미 대선이라는 정치적 평가를 거쳤다. 법적 책임 역시 사법 절차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치의 시간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여전히 '내란'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있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강력하다. 상대를 정치적으로 배제된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정치의 공간은 사라진다.

대화도 타협도 어려워진다. 정치는 전쟁이 된다.

1년째 같은 구호가 반복되는 모습은 두 가지로 읽힌다.

국정의 무능이거나 정치적 도구화다.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앞으로의 국가 방향이다.

경제는 어디로 가는가. 외교 전략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다음 성장 동력은 무엇인가.

국민은 몇 시간의 과거를 파헤치는 정부보다 24시간의 미래를 책임지는 정부를 원한다.

문제는 야당 역시 이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은 미래 비전으로 새로운 출발에 시동을 걸고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경쟁을 하지 못했다.

여권이 던진 ‘내란’의 그물 안에서 방어와 내부 공방에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싸움의 링과 같다. 누가 링의 규칙을 정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야당의 역할은 그 규칙을 깨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야당은 그 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정치의 시간은 흐르고 국가의 과제는 뒤로 밀린다.

프레임 정치가 길어질수록 국정의 체력은 약해진다.

관료 조직은 물론 사회 조직의 역동성도 움츠러든다.

전 정부의 정책 중 유효한 것조차 손대기 어려워진다.

‘내란의 유산’이라는 낙인이 씌워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정치가 과거 공방에 머무는 사이 국정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가까워진다.

국가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국정은 이어달리기다.

앞선 정부가 바통을 넘기면 다음 정부가 그 바통을 들고 달린다.

대한민국의 중요한 성취들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2002년 월드컵은 김영삼 정부가 유치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개막을 선언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이명박 정부가 유치했고 박근혜 정부가 준비했으며 문재인 정부가 치러냈다.

필자가 초창기 실무자로 참여했던 APEC 역시 같은 사례다. 2025년 한국 개최는 문재인 정부 시절 확정되었다. 이후 윤석열 정부가 경주 개최를 결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고 갓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2025 경주 APEC을 실제로 치러냈다.

국정은 단절된 5년의 조각이 아니라 이렇게 이어지는 과정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K-방산의 성과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정책과 산업의 축적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국가 경영은 그래서 아날로그다.

청산은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1년 가까이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의 부재다.

역량 부족의 무능이거나 의도된 정략이란 의구심이 든다.

앞선 주자가 떨어뜨린 바통을 빠르게 집어 들고뛰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그래야 상대를 따라잡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시간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정치는 과거를 심판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래를 설계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글/ 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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