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천에 피는 벚나무, 이런 숨은 사연 있습니다
일본 생활 18년 차인 두 아이의 엄마가 프리랜서 노동자로 살면서 경험한 일본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합니다. <기자말>
[박은영 기자]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오면 등산을 즐기시던 부모님을 따라 산에 오르곤 했다. 그 산어귀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활짝 피어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성큼성큼 앞장서는 부모님을 따라 정상에 도착하면, 엄마는 가방에서 삶은 감자나 달걀, 오이 등의 간식을 꺼내 놓으셨다. 시원한 오이 한 입 베어 물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뿌듯함과 동시에 '이걸 또 언제 내려가나'하는 부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발가락에 힘을 꼭 주고 걸어가야 안 미끄러진다."
행여 넘어질까 연신 뒤를 돌아보시던 아빠와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격려하시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봄 햇살만큼 따뜻했던 내 어린 봄의 기억은 샛노란 개나리와 분홍빛 진달래를 배경 삼아 마음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3월이다. 봄이 왔다. 조국 산천이 아닌 바다 건너 일본에서 맞이하는 봄이 사뭇 아쉬운 이유는 추억 속 봄꽃들을 그다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까. 진달래, 개나리, 복숭아꽃... 조국의 봄을 대표하던 꽃들 대신, 이곳의 봄을 독차지한 꽃이 있다. 사쿠라, 벚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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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대표적 벚꽃 명소로 꼽히는 도쿄 도심 지도리가후치 연못에서 행락객들이 보트의 노를 저으면서 만개한 벚꽃을 즐기고 있는 모습. 2022.3.29 |
| ⓒ 연합뉴스 |
3월 들어 뉴스에서는 매일 벚꽃 관련 소식이 보도된다. 분홍빛으로 물든 '벚꽃 개화 예상도'를 보고 있자니, 새삼 일본인의 벚꽃 사랑이 유난스럽단 생각이 든다.
한두 송이 피나 싶더니 순식간에 나무 전체가 꽃으로 뒤덮이고, 미련 따윈 없다는 듯 일제히 져버리는 벚꽃. 일본인들은 이 모습에 특별한 애착을 보인다. 혹자는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는 일본인 특유의 미의식이 벚꽃에 투영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이 꽃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추억' 때문이지 않을까. 졸업과 진학, 취업 등이 대부분 3월 말에서 4월, 바로 벚꽃 시기와 맞물려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에게 벚꽃은 단순한 꽃이 아닌 아름다웠던 그때로 돌아가는 '추억 소환 장치'처럼 보인다.
이 벚꽃, 올해는 예년보다 일찍 개화가 시작될 예정이라 한다. '전국에 벚나무가 몇 갠데 개화 시기를 다 맞추지?' 궁금해 찾아보니, 일본 각지에 '표준목'이 있단다. 일본 기상청이 주요 도시마다 기준이 되는 벚나무를 정해두고, 꽃이 5~6송이 피면 '개화', 80% 이상 피면 '만개'로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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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일본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있는 '표준목' 주변에서 1일 방문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일본 기상청은 이 표준목을 기준으로 도쿄의 벚꽃 개화를 선언한다. 2016.4.2. |
| ⓒ 연합뉴스 |
이 '소메이요시노'는 오랜동안 원산지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제주 지역에 자생하는 '왕벚나무'와 혼동되어 "일본 벚꽃은 실은 한국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탓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어느 식물학자가 "두 나무는 같은 종"이라는 발언을 했던 것이 논란을 가속시켰다.
그러나 2000년 들어 엽록체 유전자 검사로 두 나무가 전혀 다른 종임이 밝혀졌다. 자연종인 제주의 왕벚나무와 달리 소메이요시노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인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무의 이름에 탄생 비화가 담겨있다. '소메이(染井)'는 지금의 동경 토시마구에 위치한 '소메이무라'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곳에는 원예 기술에 뛰어난 정원사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이들이 소메이요시노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요시노(吉野)'는 8세기부터 벚꽃으로 유명했던 '요시노산'을 말한다. 나라현에 위치한 이 산에는 약 3만 그루의 벚나무가 층지어 심겨 있어 마치 분홍 융단이 깔린 것 같은 장관을 이룬다. '소메이요시노'는 "요시노산의 벚꽃처럼 보이는 소메이 마을의 벚나무"인 셈이다.
이 소메이요시노, 한반도에도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도시 정비라는 명목으로 전국 곳곳에 심어졌다. 지금 한국에서 흔히 보는 벚꽃길 상당수도 이때 조성된 것이다. 광복 이후 일제의 잔재이니 잘라버리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봄 풍경으로 자리 잡은 까닭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그대로 남아 관광지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군항제로 유명한 진해나 봄꽃축제가 열리는 여의도 윤중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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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일본 여인들의 하나미 모습 |
| ⓒ 위키미디어 공용 |
해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이른 아침부터 벚나무가 심긴 공원에는 하나미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이색적인 모습도 볼 수 있다. 코로나 이후 배달 문화가 정착되며 각종 음식을 손에 든 라이더들이 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도 색다른 풍경 중 하나다.
행여 벚꽃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벚꽃을 테마로 한 각종 먹거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맘때쯤이면 일본 전국의 편의점, 슈퍼, 레스토랑 등에는 기간 한정 메뉴들이 손님들의 발걸음을 붙든다.
그중 대표가 '사쿠라모찌'다. 분홍빛 떡에 팥을 넣고, 소금에 절인 벚꽃잎으로 감싸 만든 떡이다. 에도 시대 아사쿠사 근처 떡집 주인이 소금에 절인 벚꽃 잎으로 떡을 감싸 만든 것이 유래라고 전해진다. 작은 떡집에서 시작된 이 메뉴가 인기를 얻어, 지금은 일본 전국 어디서나 봄철에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디저트가 됐다.
벚꽃을 '마시는' 문화도 있다. '사쿠라사케'다. 맑은 술잔에 따뜻한 사케(일본 청주)를 따르고 소금에 절인 벚꽃 한 송이를 띄워 마시는 것이다. 이 술은 벚꽃을 소금에 절여 저장하던 일본의 오래된 식문화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보고, 먹고, 마시며 오감(五感)으로 벚꽃을 즐기는 일본의 3월. 그러나 내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화려한 벚꽃이 아닌, 어쩌다 발견한 개나리, 진달래 같은 낯익은 얼굴들인 걸 보면, 고향 산천을 그리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것'이지는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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