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고문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단종의 충신들
역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텔러'입니다. 국내와 해외의 주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말>
[최경식 기자]
(이전 기사 : '달빛에 빼든 철퇴, 한밤 중에 발생한 쿠데타'에서 이어집니다.)
세조는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그는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했고, 6조 직계제를 실시했다. 이는 대신들을 배제한 채 국왕 중심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실시하면서 세조는 "의정부서사제는 임금이 죽은 제도이다. 너희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어려서 정치를 재결(裁決)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했다. 아울러 종친, 공신 등을 대거 발탁해 의정부, 6조, 승정원, 고위 군직에 포진시켰다(종친의 정치 참여는 원래 금지됐다). 이를 통해 친위 그룹을 만듦으로써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세조는 신하들과 함께 논쟁하는 경연 및 대간의 활동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에 따라 대간에 대한 탄압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모습에 집현전 유학자들의 반감은 높아졌다. 이들은 세종, 문종대에 대간을 통해 조정에 진출했고, 신권이 중심이 된 유교정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에 대한 반감도 상당했다. 집현전 유학자들은 신하인 세조가 함부로 충의를 저버린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이었다(무신인 유응부까지 포함해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연스레 세조를 폐위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거사를 모의하게 된다.
사육신 사건
무신인 성승(성삼문 아버지), 유응부 등은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규합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중 1456년 6월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이 날은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을 환송하기 위해 창덕궁에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세조도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왕의 양옆에서 칼을 들고 서있는 별운검(別雲劍)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선택됐다.
|
|
|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 ⓒ 쇼박스 |
당초 충실한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이었던 김질이 화근이었다. 그는 연회장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 이러다가 거사 계획이 발각돼 본인은 물론 가문 전체가 멸족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김질은 동지들을 배신하기로 했다. 그는 장인이자 주요 대신인 정창손을 찾아가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 계획을 알렸다. 이를 들은 정창손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즉각 김질과 함께 세조를 찾아갔다.
밀고를 접수한 세조는 크게 노했다. 그는 거사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 들여 국문할 것을 명했다. 김질의 입에서 언급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이 우선적으로 체포돼 국문을 당했다. 성삼문이 국문을 받다가 관련자로 박팽년, 유성원 등을 언급했고, 이후 박팽년이 국문을 받다가 관련자로 김문기, 성승, 윤영손, 송석동 등을 언급하면서 국문의 규모는 매우 커졌다. 이 밖에 박중림, 권자신, 최득지, 박기년 등이 추가되면서 단종 복위 운동 혐의로 국문을 받은 사람은 무려 70여 명에 달했다.
'육신전'을 보면 사육신을 중심으로 당시 국문장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세조실록'은 그렇지 않다). 우선 성삼문은 팔이 잘리는 잔인한 고문에도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며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세조가 "나리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과인이 준 녹봉은 왜 받았느냐"라고 묻자 성삼문은 "나리가 준 녹봉은 하나도 안 썼으니 우리 집에 가서 확인해 보라"라고 답했다. 실제로 성삼문의 집을 조사해보니 녹봉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박팽년도 성삼문 못지않게 세조를 모욕했다. 세조는 박팽년에게 "과거에 그대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있을 때 과인에게 올리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써놨고, 녹봉 또한 잘 받지 않았느냐"라고 따졌다. 이에 박팽년은 "'신'이라고 쓴 적이 없으니 다시 잘 살펴보고, 녹봉도 그대로 쌓아놨다"라고 답했다. 세조가 박팽년의 공문을 다시 살펴보니 모두 '신'(臣) 자가 아닌 '거'(巨) 자로 기록돼 있었다. 비슷한 글자를 사용해 교묘히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박팽년의 집에도 녹봉이 그대로 있었다. 크게 노한 세조는 불에 달군 인두로 박팽년의 몸을 가혹하게 지졌다.
단종의 충신들
이개는 국문장에서 형벌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조에게 "나리, 도대체 법전 어디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실제로 그 당시 조선 법에는 이와 같은 형벌이 존재하지 않았다. 왕이면서 기본적인 법도 모른다고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훗날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드는 세조는 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했다고 한다. 하위지는 사실상 묵비권을 행사했다. 세조가 반역 혐의들에 대해 취조할 때 그는 "내가 반역죄라면 그 죄가 반드시 죽음일 것인데, 나리가 물어볼 것이 더 뭐가 있겠는가"라고만 답했다.
유응부는 국문장에서 세조는 물론 사육신도 비난했다. 우선 그는 세조를 나리보다도 못한 '족하'(足下)라고 불렀다. 이는 '서 있는 곳의 바로 아래' 또는 같은 또래 사이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이어 성삼문, 김문기 등을 향해 "너희는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 놈들과 거사를 치른 것이 내 일생일대의 실수다"라고 일갈했다. 자신의 말대로 거사를 강행했어야 했는데, 뜯어 말려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는 한탄이었다. 성삼문 등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사육신을 포함한 70여 명의 단종 복위 운동 관련자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세조는 매우 잔인했다.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김문기, 박중림, 성승 등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기감 앞에서 (세조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다. 세조는 굳이 신하들에게도 형벌을 보게 함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시키고 반란을 차단하고자 했다.
박팽년의 경우 국문을 당하던 중에 사망했는데, 이후 시신이 된 상태에서 거열형을 당했다(유성원은 체포되기 직전 자신의 집에서 목에 칼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시신도 박팽년과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형이 끝난 후 이들의 목은 저잣거리에서 3일 간 효수됐다. 이렇다 할 무덤도 없이 방치됐던 시신들은 생육신이었던 김시습에 의해 어느 정도 수습이 됐다. 그는 지금의 노량진에 사육신의 무덤을 만들었다. 비단 당사자들만 화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친아들들은 모조리 목이 졸려 죽는 교형을 당했고, 모친과 딸 등은 노비로 전락했다. 성삼문 등은 아예 직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이처럼 단종의 충신들은 당대에 철저하게 패배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복권 되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성종 대에 그들의 후손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됐고, 숙종 대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이 회복된 후 민절서원이 세워져 위패가 안치됐다. 영조 대에는 김문기, 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됐다.
특히 정조가 즉위한 후 단종의 능인 장릉에 배식단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던 화이군 이영을 포함, 계유정난과 복위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사육신이 묻힌 노량진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결국 이들은 역사 속에서 '충절의 화신'이라는 승자로 남게 됐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최경식 기자의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법원 판결 뒤집은 행정심판위...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나
- 영화 보러 인천에서 여의도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단독] '쿠팡 변호' 김앤장 변호사와 '대검 지시사항' 공유한 차장 검사
- "무안공항 노지에 방치된 유해가 내 아버지라니..." 청와대 앞 눈물바다
- 최초, 최초, 최초...평양 '오마니'의 조선 사랑
- '주점 성추행 논란' 반성한다더니... 또 출마하려는 전직 국힘 군의원
- 'AI는 절대 못 쓰는 글'로 책 내는 사람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 박찬운 검찰개혁 자문위원장 사퇴... "보완수사 폐지 반대 소신"
- "을지로에 거대 미술관 만들려고요" 이 예술가들이 꿈꾸는 미래
- [오마이포토2026]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배현진 '헛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