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가 탄식과 흐느낌... '왕사남' 의 흔치 않은 미덕
[김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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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
| ⓒ 쇼박스 |
2024년 <파묘(破墓)>와 <범죄도시 4> 이후 맞이한 경사다. 조선의 국왕을 전면에 내세워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두 편이다. 광대와 폭군(暴君) 연산의 있을 법하지 않은 서사 <왕의 남자>(2005)와 왕이 아닌 남자의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그것이다. 그러면 <왕과 사는 남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는가?!
간명한 갈등 구조
12살에 왕이 되었다가, 3년 만에 숙부에게 밀려나 허울뿐인 상왕으로 밀려난 단종. 마침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 우리는 강인하고 사악한 권력자 세조와 유약하고 선량한 단종의 이미지에 길들어 있다. 권력의지로 충만한 장년의 사내와 그에게 목숨마저 빼앗기는 소년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다.
장항준 감독은 약하지만 착한 단종과 강력하되 사악한 세조의 대결 구도를 한사코 회피한다. 그는 세조 자리에 한명회를 넣음으로써 익숙한 갈등 구조를 극복한다. 그로써 이씨 왕조를 지키려는 양녕과 효령대군의 왕당파와 신권(臣權)을 대표하는 사육신의 판에 박힌 대결과 작별한다. 대군들은 사라지고, 사육신은 스치듯 가볍게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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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한명회(유지태 분). |
| ⓒ ㈜쇼박스 |
영화는 사실과 허구 사이에 자리한다고 처음부터 밝힌다. <왕과 사는 남자>에는 역사적 사실만큼이나 상상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까닭에 노산군을 알고, 망향대(望鄕臺)와 노산대(魯山臺)가 있는 청령포를 다녀온 관객에게 영화는 낯설고 신기하게 다가온다. 공부 대신 활쏘기에 전념한 태산이 노산군에게 던지는 언사는 경이롭다.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평등한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부모에 따라 자식의 계급이 결정되는 신분제 국가 조선에서 산골 평민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뼛속 깊이 왕족인 노산군이 태산의 말에 수긍한다는 사실이다. 여기부터 영화의 관심은 권력 집단 내부의 갈등과 아울러 새로운 대동세상(大同世上) 건설을 향한 민초(民草)와 노산군의 꿈으로 옮아간다.
무기력하고 병약하며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단종. 한명회의 강권(强勸)에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단종. 이윽고 외로운 섬처럼 서강(西江)에 둘러싸인 청령포에 유배되는 노산군. 그가 어떻게 실의와 낙담과 죽음보다 깊은 절망의 나락에서 조금씩 일어서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영화가 <왕과 사는 남자>다.
당당한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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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금성대군(이준혁 분) |
| ⓒ 쇼박스 |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노산군은 또 어떤가! 나약하고 어린 소년에서 힘 있고 명민한 청년으로 변모하는 노산군. 그는 숙부가 내린 사약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는 타살의 형식에 의지한 자살을 선택한다. 문밖에서 푸르게 넘실거리는 서강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흐르는 삼도천(三途川) 삼아 의연하게 넘어가려 한다. 바야흐로 그때가 온 것이다. 그는 의연하고 단호하다.
눈물 속의 웃음
<왕과 사는 남자>가 상영되는 동안 곳곳에서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탄식과 흐느낌이 잦아진다. 영화는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버무려진 희극성과 예기치 못한 비장미가 뒤섞인다. 한 편의 영화에서 서로 모순되는 미학적 원칙이 배치되지 아니하고 사이좋게 공존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미덕이다. 그 중심에 엄흥도가 자리한다.
엄흥도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잘 먹고 잘살자는 현세주의 철학으로 무장한 촌장이고, 아들 사랑이 지극한 자상한 아비이며, 제 욕심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속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엄흥도는 우리가 말하는 민중 혹은 백성의 원형질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물질적-세속적 욕망에 충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엄흥도.
역사는 엄흥도를 영월의 호장(戶長)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낸 충신으로 기록한다. 세조는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린다. 하지만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 엄씨 선산에 안장한다. 그가 남긴 말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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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
| ⓒ 쇼박스 |
<왕과 사는 남자>는 신선한 소재도 자극적인 내용도 없고, 몸값 비싼 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속도는 가을날 서강처럼 유장하게 흐른다. 속도가 생명인 21세기 20년대 광속의 시간대에 600년 전 이야기가 느릿하게 진행된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지루하거나 진부한 영화가 아니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청령포에는 오늘도 유람객이 넘쳐난다.
백성이 완벽히 소외된 궁궐 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어린 왕을 향한 연민의 정. 그를 살리고자 온마을 사람들이 애태우는 따사로운 장면.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순진무구한 촌장. 거기서 불타오르는 '공정'에 기반한 '대동 세상'을 향한 열망. 패배하되 파괴되지 않는 인물들과 그들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백성들.
단종보다 한 살 많은 정순왕후 송씨(宋氏)가 빠진 것은 다소 아쉽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峯) 기슭에 초가를 짓고 단종의 무사(無事)를 기원한다. 노산군의 죽음 이후 홀로 65년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 남양주에 있는 사릉(思陵)에서 그녀는 지금도 영월 장릉(莊陵)의 단종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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