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떠난 지 4년, 결혼 40주년 맞아 아내에게 쓴 편지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기자말>
[이안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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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몬테 알반 가는 길. 고대 자포텍(Zapotec) 문명의 수도로, 약 1,500년 동안 번영했다가 폐허로 남은 몬테 알반(Monte Alban) 유적을 찾아가는 길. |
| ⓒ 이안수 |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지금 몇 페이지쯤을 살고 있을까. 사실 그 책이 몇 페이지로 엮였는지조차 알 수 없다. 마지막 장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내 아이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덮이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볼 테니.
오악사카에 도착한 날이 1월 18일이었으니, 3월 5일로 49일째이다. 우리는 처음 짐을 푼 현재의 호스텔을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다. 지난주, 함께 오래 머물던 몇몇 여행자들이 떠난 뒤, 우리는 3개월째 묵고 있는 애틀랜타 출신 버드 씨 다음의 최장기 투숙객이 되었다.
오악사카에는 온갖 종류의 숙소가 넘쳐나지만,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붙드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건물은 오래 되었어도 공간은 넉넉하다. 중정을 비롯한 공용 공간이 넓어서, 어느 책상에 앉더라도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도심에 자리한 덕분에 시내 어디든 걸어서 닿을 수 있고, 주변에 큼지막한 시장이 여럿 있어 장기 체류자에게 식재료 구입의 부담이 없다.
이 도시에서 주변 마을로 향하는 버스는 목적지마다 터미널이 제각각인데, 그 터미널들이 마침 인근에 모여 있어 어디든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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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스텔의 로비.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흩어지는 곳, 호스텔. 각기 다른 삶들의 교차로에서 휴먼북을 읽는다. |
| ⓒ 이안수 |
삶의 무게를 줄여준 것은 '감사'와 '베풂'
도착한 첫날부터 유독 눈길이 머문 사람이 있었다. 게스트가 아니라, 우리 방이 있는 층을 도맡아 관리하는 여성이었다. 출근부터 퇴근 시까지 한시도 소홀함이 없었다. 야무진 베딩은 물론, 공용 화장실 청소는 하루에 세 번씩 한다. 이동할 때는 늘 종종걸음이다. 그 덕분인지 벌레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한다.
그녀의 이름은 로시오 마르티네스(Rocio Martinez), 두 손녀를 둔 쉰아홉 살의 여인이다. 어제는 아내가 토르티야를 사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내일 제가 오악사카 사람들이 즐겨 먹는 큰 숯불 토르티야를 가져다드릴게요."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큰 토르티야를 내밀었다. 틀라유다(tlayuda)에 쓰이는, 지름이 40센티미터는 족히 될 법한 크기로 숯불에 구워 바삭하게 익힌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제 속마음을 얘기하고 싶군요. 전 지난 50여 일간 변함없이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잠시 미소를 머금더니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선생님 내외분의 따뜻한 마음을 늘 느끼고 있었어요. 저는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생명을 주신 것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하신 것에, 일할 수 있는 곳을 주신 것에, 그리고 그 일로 가족과 형제자매를 도울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그러니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저에게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자녀들도 어머님의 그 심성을 닮았겠지요?"
"아이들은 본래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조건 없이 내어주는 마음을 타고납니다. 저는 그 순수한 본성이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곁에서 격려했을 뿐이에요. 지금 아이의 아버지가 된 제 아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가 없이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있고, 어르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면 늘 먼저 달려갑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나신 저희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베풀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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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어야 할 자리. 샤워커튼의 문구, "You are right where you are meant to be(당신은 지금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호스텔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현재의 상황과 위치가 우연이 아님을 확인한다. |
| ⓒ 이안수 |
"You are right where you are meant to be(당신은 지금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발길을 멈추고 뒤쳐진 영혼을 기다리다
지난 3월 1인은 우리의 결혼 40주년, 루비웨딩(서양에서 결혼 40주년을 부르는 말, 루비 보석의 강인함과 변치 않은 사랑을 상징)이었다. 우리가 나라 밖 순례를 떠나온 지 4년째가 되는 달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선한 사람들의 도시, 오악사카에서 발길을 멈추고 뒤처진 영혼을 뒤돌아보았다. 아내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도 '감사'였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남의 은혜 때문인 것 같아요. 조상님의 차례를 모시는 일을 대신해 주고 마을 공동체의 의무를 감당해 주고 있는 시누이와 조카딸, 아들 며느리 혼인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우리의 불비에도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 주신 사돈 내외, 부모 쳐다보지 않고 제각각의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들까지..."
나도 아내의 말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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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을. 우리가 묵는 호스텔은 특히 사라진 문명인 몬테 알반의 산정으로 지는 노을이 아름답다. |
| ⓒ 이안수 |
루비 노을
3월 1일, 사십 년 전 오늘의 의미를 돌이켜봅니다. 부부로서 2인 3각의 동행 약속을 친지와 벗들께 공표했던 날이지요.
수많은 계절을 함께 걸으며 홀로는 불가능했을 일들을 이루어왔습니다. 그 계절의 모퉁이마다 당신의 노고가 얼마나 깊이 깃들어있는지 잘 압니다.
당신의 마음과 손길로 어루만져 세 아이들 모두 제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었고, 이제 손녀의 탄생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실 때까지 잘 배웅해 드렸습니다. 내가 욕심을 낸 일들로 소홀할 때 당신은 곁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필요를 채워드렸습니다. 함께 해야 할 일을 당신 홀로 감당한 것에 빚진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무를 끝냈다고 여긴 때에 일에 대한 욕심을 떨쳐내고 우리의 삶에 집중하겠다는 결심을 해주어 고맙습니다.
육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나라밖 낯선 땅을 십 년쯤 순례하는 산책자로 살자는 요청을 동의해 주어 감사합니다.
낯선 길을 함께 걸은 지 네 번째 해, 길 위에서도 당신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걸식하는 남루한 모녀와 부녀 앞에 멈춰 서고, 슈퍼마켓 대신 전통시장의 마늘 몇 단을 맨 행상과 과일 몇 종류의 좌판을 찾습니다. 호스텔 끼니가 궁색한 어르신에게 접시 하나 더 마련하고, 김치 그리운 동양 여행자에게 직접 담근 양배추김치를 내놓습니다. 청년의 맨몸 투혼에 당신의 노자를 나눕니다.
당신은 여전히 나의 스승이며 누군가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루비웨딩 기념일. 우리는 루비처럼 붉게 저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붉은 노을에 발길 멈추고 아름다움에 감응하였던 날들처럼 이제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노을을 짓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허락되는 때까지 세상의 신비와 조화로움, 존재의 경외와 아름다움을 산책합시다. 그 길에 당신과 함께임을 감사합니다.
2026년 3월 1일 노을이 아름다운 오악사카에서
_ 당신의 도반으로부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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