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작품은 보이지 않고 사건만 남는다

김희윤 2026. 3. 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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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티노 세갈' 개인전
관객의 몸으로 완성되는 미술
기록 없는 미술로 '관객의 시간'을 흔들다

리움미술관 로비에서 갑자기 누군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미술관 직원처럼 보이던 사람이 "디스 이즈 소 컨템퍼러리(This is so contemporary)"라고 외친다. 관객 몇 명이 웃고, 몇 명은 잠깐 멈춰 선다. 이때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하는 행동이 있다. 휴대폰을 찾는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는 그다음 동작이 이어지지 않는다. 촬영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 첫 개인전을 위해 서울 리움미술관을 찾은 작가 티노 세갈. 연합뉴스

4일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한 티노 세갈 개인전은 이 작은 어색함에서 시작된다. 작품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관람 방식을 바꿔 놓는다. 우리는 전시장에 들어가면 대개 작품을 보기 전에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남기면서 관람이 시작된다. 세갈의 전시는 그 순서를 잠깐 멈추게 한다.

영국 출신 작가 티노 세갈은 지난 25년 동안 한 가지 질문을 밀어왔다. 물질이 없는 예술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는 회화나 조각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사람의 몸과 목소리, 그리고 관객과의 관계를 작품의 재료로 삼는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공연이 아니라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이라고 부른다.

전시장 안에는 해석자(interpreter)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이 있다. 어떤 이는 천천히 걷고, 어떤 이는 춤을 추고, 어떤 이는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관객은 그 장면 사이를 지나간다. 어느 순간에는 누가 작품이고 누가 관객인지 잠깐 헷갈린다.

누군가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관객은 잠깐 멈춘다. 대답해야 할지, 그냥 지나가야 할지 생각한다. 그 짧은 망설임이 이 전시가 만들어내는 시간처럼 보인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키스'(2010) 전시. 리움에서는 로댕의 조각들 사이로 두 해석자가 이를 몸으로 재현한다. 사진 AP

대표작 '키스(Kiss)'는 이런 작업 방식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리움이 소장한 로댕 조각들 사이에서 두 해석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천천히 움직인다. 미술사 속 다양한 '키스' 장면이 살아 있는 몸으로 재현된다. 청동 조각과 살아 있는 신체가 같은 공간에 놓이면서 조각의 조건이 조금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질 없이도 조각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조각을 물건이 아니라 장면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몸의 자세, 두 사람 사이의 거리, 관객의 시선 같은 것들이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세갈의 작업에서는 같은 작품이라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다. 해석자가 바뀌고 관객이 바뀌고 상황이 바뀐다. 같은 제목의 작품이지만 같은 작품은 아니다. 전시장에서는 늘 조금 다른 장면이 만들어진다.

세갈은 작품을 물질로 남기지 않는다. 촬영도 허락하지 않는다. 도록도 거의 제작하지 않는다. 작품을 판매할 때도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공증인 앞에서 구두로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술가는 자기 시대를 기록하는 사람이며, 나는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

티노 세갈 전시 포스터_디자인 김영삼. 사진 리움

그래서 이 전시에서 관객이 가져가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아마도 경험일 것이다. 전시를 보고 나오면 사진은 한 장도 없다. 대신 이상하게 몸이 조금 어색하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이 계속 떠오른다. 어쩌면 세갈의 작품은 미술관에 남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에 잠깐 머물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는 세갈의 작업 여덟 점이 소개된다. '이 입장(This Entry)', '이 환희(This Joy)', '이 당신나나당신(This YouYou)'은 6주 간격으로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미술관 정원에서는 중년 여성 해석자가 관객을 향해 노래를 건네는 '이 당신(This You)'이 4월 3일부터 시작된다.

전시장에는 세갈이 직접 골라 연결한 리움미술관 소장품도 함께 놓였다. 강서경과 권오상, 솔 르윗,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들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조각들이 같은 공간에 서 있다. 몸과 존재를 다루는 세갈의 작업 옆에서, 그 조각들은 오래된 질문을 조용히 이어간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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