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보았다... 소설가의 초상화에 숨겨진 '두 인격'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인문학을 친근한 미술작품을 통해 새롭게 조명합니다. 작품 속에 숨겨진 시대정신과 작가의 문제의식을 살피고 이를 동서양 고전으로 심화해 독자의 예술적 감수성을 높이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기자말>
[박홍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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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싱어 사전트 <스티븐슨과 패니> 1885년 |
| ⓒ 퍼블릭 도메인 |
유럽에서 활동한 미국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스티븐슨과 패니>는 소설가의 초상화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문제의식도 상징적으로 녹아 들어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초상화 형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얼굴보다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왼쪽의 스티븐슨이 거실을 서성이다 흘낏 시선을 돌려 감상자 쪽을 향한다. 한 손을 얼굴에 대고 있는 모습으로 볼 때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왜 어두운 방을 묘사했을까
그런데 꼼꼼하게 살피면 화가는 우리에게 더 깊은 생각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먼저 소설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는 빛에 대비하여, 뒤에는 사물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방이 보이도록 방문을 열어두었다.
화면을 좌우로 거칠게 나누는 기형적 구도이고,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도 않아 특별히 열어둘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화가의 의도적인 설정이라고 봐야 한다. 오른편 의자에 앉아 있는 아내 패니의 묘사도 마찬가지다. 의상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금빛으로 반짝인다. 하지만 얼굴은 머리에 쓴 숄의 그림자에 가려 어둠 속에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다.
현상적으로 세상에 보이는 밝은 모습과 전혀 다른, 어떤 면에서는 상반된 어두운 속성이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설정이 아닐까 싶다. 화폭에 묘사된 분위기로 봐서는 한 면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는 긍정적인 상태를, 다른 면은 사회적으로 부끄럽거나 악하다고 여기는 부정적인 상태를 대변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극적으로 대비되는, 한 사람 내의 두 인격을 작가의 초상화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듯하다. 화가는 스티븐슨과 매우 친밀한 친구이자 예술적 교감을 나눈 동료였고, 그를 묘사한 초상화도 세 점이나 있다. 두 사람의 친분을 고려할 때 이 소설을 쓰는 과정부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초상화에 이를 반영했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 지킬은 의학·법학박사, 왕립협회 회원 등의 직함을 가진 저명인사다. 여기에 포용력·친절함·겸손함까지 갖춰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늘 칭찬이 뒤따르는 인물이다. 지킬의 또 다른 인격이자 분신인 하이드는 반대로 사악하다. 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조금이라도 갈등이 생기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길거리에서 노신사와 시비가 붙자 지팡이로 때려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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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포스터 <지킬 박사와 하이드> 1880년 |
| ⓒ 퍼블릭 도메인 |
말끔한 정장 차림의 지킬이 쥔 잔에서 마시고 남은 약물이 흘러 내린다. 변신이 시작되면서 추악한 분신이 어둠 속에서 점차 허리를 펴며 깨어난다. 지킬의 선량한 눈은 사라지고, 하이드의 눈은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광기가 서려 있다.
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다. 도덕심과 선한 성격이 사라진다. 온갖 절제에서 탈피한 야만적이고 거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벽에 걸린 그림도 등대 주변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광경이어서 휘몰아치는 격변을 암시한다.
일단 약물로 변신한다는 설정, 긴박하게 전개되는 추리소설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백미는 뒷부분에 지킬이 편지 형식으로 독백하는 대목이다. 저자가 이 책으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왜 약물을 개발해 전혀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한다. 하이드는 본래 자기 내부에 있던 경향이었다.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었다."
하지만 근엄하고 덕성을 갖춘 학자로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에 욕망을 감추고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밤이 되면 쾌락에 몸을 맡기는 생활이 이어졌다. 고귀함을 갖춘 낮의 인격만큼이나 밤의 인격도 행복을 주는 진지한 욕구였다. 이중적인 삶을 유지하던 중 새로운 발상이 시작된다.
"만약 각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에서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길을 가면 될 것이다."
선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기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 폭력적인 자기를 모두 인정한다. 만약 명예와 평판에 매달린 인생만을 인정한다면 평생 즐거움을 포기한 채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의 자신이 저지를 악한 행동이라 해도 여전히 하나의 개체 안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가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완전히 독립된 두 개체에 상반된 인격을 담으면, 서로에 대한 부담 없이 각각이 원하는 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연구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약물을 발견한 게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방법을 과학을 이용해 찾아낸 것이다. 약을 마셨을 때 나타난 개체는 마음속의 또 다른 인격이었던 충동적 쾌락의 특성을 그대로 갖는다. 육체는 더 젊어지고 관능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도덕적 책임감이 사라지고, 온갖 절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이드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스티븐슨의 문제의식은 소설 속의 상상에 머물지 않는다. 지킬과 하이드라는 특이한 설정 속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하이드가 현실에서 보기 힘든 유별난 괴물도 아니다. 작가는 "인간은 결국 여러 개의 모순되면서도 각기 독립적인 인자들이 모인 집합체"라고 한다.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본성 문제로 접근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갈등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 인간의 존재만큼이나 오래되고 진부한 것"이다. 선 혹은 악 가운데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여러 경향이 혼재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작가 내면의 양면성을 담다
작가 스티븐슨의 개인적인 특성과 열망이 소설로 반영된 측면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지킬 박사가 그러했듯이 유명한 모험 소설 〈보물섬〉으로 이미 사회적 인정을 받는 작가였다. 너그럽고 친절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주었다.
또한 약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저항하여 의식 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허약한 몸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평생에 걸쳐 질병을 안고 살았고, 특히 이 소설을 쓸 즈음에는 결핵으로 쇠약해져 침대에 누워 모르핀에 의존해 살았다.
스티븐슨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에 따르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 기본 내용은 투병 와중에 꾼 자신의 꿈이 동기가 되었다. "지킬 박사에 대한 꿈을 꿨어요. 어떤 남자가 약을 먹고 다른 존재로 변하는 꿈이었죠." 아내 패니가 가위에 눌린 신음을 듣고 깨우자, 그는 "왜 날 깨웠어? 멋진 공포 이야기를 꿈꾸고 있었는데!"라고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쇠약해진 몸으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소설로 완성했다. 패니는 나중에 그의 작업에 대해 "남편처럼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6일 만에 6만 단어를 글로 옮기는 육체노동을 해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평생 병을 달고 살았던 그에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하이드의 신체적 능력은 숨겨진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작가이자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알려진 이면에 꿈틀거리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이십 대 중반에 프랑스 여행 중에 열 살 연상의 유부녀인데다,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패니를 사랑한 열정을 지녔으니 말이다.
자기 내부에 지킬의 신중함과 하이드의 광기 어린 열정이 있었고, 무의식에 눌려 있던 광기가 꿈으로 나타나는 순간 집필 의욕이 터져 나왔던 듯하다. 화가 사전트는 스티븐슨의 삶과 내면에서 지킬과 하이드의 서로 다른 속성을 발견하고, 이를 특이한 초상화 형식과 의미심장한 설정으로 캔버스에 담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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