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외면한 판사들의 정체... 이래도 '법왜곡죄'가 과하단 말인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3. 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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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바로잡은 역사] 조작된 신귀영 일가 간첩 사건

[김종성 기자]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법왜곡죄의 신설이 조만간 마무리된다. 공무원의 직권남용을 처벌하는 형법 제123조 바로 뒤에 법왜곡죄(제123조의 2)를 추가하는 형법 개정안이 지난달 26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법을 올바로 적용하지 않는 수사관·검사·판사는 10년 이하 징역과 10년 이하 자격정지를 받게 된다. 법령을 적용할 때 그 요건을 준수하지 않거나, 증거를 인멸·은닉·위조·변조하거나 위변조된 증거를 재판·수사에 사용하거나,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된 사실을 알면서도 범죄사실을 인정하거나 적법한 증거가 없음을 알면서도 범죄사실을 인정하면 그렇게 된다.

수사와 재판은 사실과 법률을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살인이라는 사실이 발생했다면 살인죄를 처벌하는 형법 제250조가 적용돼야 한다. 살인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살인죄가 적용되거나, 살인이 발생했는데도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사실과 법률 사이에 왜곡이 발생한다. 법을 갖고 이런 장난을 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법왜곡죄 신설의 취지라고 할 수 있다.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죄를 통해서도 법왜곡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조문은 1953년 9월 18일의 형법 제정 이후로 항상 있었다. 그렇지만 수사관·검사·판사의 법왜곡은 끊이지 않았다. 이 조문으로 법왜곡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
 2009년 8월 21일 외항선원이던 1980년 간첩으로 몰려 각각 징역 15년과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신귀영(74.왼쪽)씨와 신춘석(72.오른쪽)씨가 부산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악목같았던 지난세월을 회상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0년의 신씨 일가는 법왜곡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한 집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집안의 신귀영·신복영·신춘석·서성칠은 법왜곡의 피해자가 되어 간첩죄를 뒤집어쓴 뒤 징역 15년 및 자격정지 15년(귀영·성칠), 징역 10년 및 자격정지 10년(춘석),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자격정지 3년형(복영)을 받았다.

신귀영·신복영은 형제 간이고, 신춘석은 이들의 5촌 당숙이다. 서성칠은 신씨 형제들의 사촌 처남이다. 네 사람은 신씨 형제들의 친형인 재일교포 신수영에게 포섭돼 간첩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1980년 2월과 3월에 부산시경찰국 대공분실로 불법 연행돼 고문과 가혹행위를 받았다.

부산시경은 '재일교포 신수영은 조총련 간부'라는 점을 기본 전제로 해서 그 친족들을 간첩으로 엮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신귀영 일가 간첩조작 의혹 사건' 편은 "신귀영·서성칠·신춘석은 196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일본을 왕래하며 재일 조총련 간부로 지목된 신수영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군사기밀을 탐지한 혐의로, 피해자 신복영은 불고지 혐의로" 엮었다고 기술한다.

조총련 간부 신수영이 한국 친족들에게 지령을 내려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기본 얼개다. "범죄사실은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고 위 보고서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 기본 얼개에서부터 결정적 결함이 있었다.

부산시경 대공분실은 중앙정보부가 1975년에 작성한 조총련 인명부에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로 기재된 점을 근거로 1978년부터 이 집안의 동향을 내사했다. 그러다가 1979년에 내무부장관에게 신수영의 조총련 가입 여부 등을 확인해달라고 의뢰했다.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을 통해 전달된 내무부장관의 회신은 신수영이 어디 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신수영은 소재 불명으로 조사불능"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라는 증거는 물론이고 회원이라는 증거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1980년 12월 22일 자 <경향신문> 2면은 재일교포 규모와 관련해 "79년말 현재 그 수는 66만 2백 27명이라는 게 일본 법무성 집계"라고 한 뒤 "전체의 62.6%(41만 3천 3백 16명)만이 우리 국적을 가진 이른바 민단계 동포"라며 "나머지의 대부분은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소위 조총련계 동포들"이라고 설명한다.

'식민지시기 조선반도 출신'을 의미하는 조선적을 보유한 조총련계가 1979년 연말에 약 25만 명이었다. 신수영이 이렇게 많은 회원을 보유한 단체의 중앙 혹은 지방 간부였다면, 내무부가 그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조총련이 남북한 및 일본 정부의 관찰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 단체 간부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내무부가 신수영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그가 조총련 간부라는 중앙정보부 인명록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무슨 근거로 인명록을 만들었느냐고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에 문의했다. 국정원은 "이를 보존하고 있지 않다"는 회신을 보냈다고 위 보고서는 말한다. 중앙정보부 인명록과 상충하는 내무부 조사 결과가 있었고 그 인명록의 근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면, 인명록의 신뢰성은 땅에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산시경은 내무부장관의 회신을 받고도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라는 전제하에 수사를 진행했다. 조총련 간부와 접촉해 지령을 받았다며 그 일가를 체포하고 불법 수사를 벌였다.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울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면서도 그런 방식을 동원해 간첩 자백을 받아냈다.

법왜곡이 경찰 단계에서 끝났다면 이 일가의 피해가 더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단계의 법왜곡이 피해를 더욱 키웠다. 1980년 5월 15일에 사건을 송치받은 부산지방검찰청은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가 맞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사건을 재판에 넘겼다. 부산지방법원·대구고등법원·대법원도 그 문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의심을 하도록 고도의 훈련을 받은 법률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그 부분을 외면했던 것이다.

법원은 검찰에 비해 한술 더 떴다. 피고인들은 수사관과 검사 앞에서는 허위자백을 했지만, 판사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위 보고서는 피고인들이 "부산지법에 이르러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했다고 알려준다. 법원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증거가 극히 부실하고 피고인의 자백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건에서 피고인이 자백의 효력을 부인하는데도 판사들은 그냥 넘어갔다. 이 재판은 1981년 6월에 대법원 확정판결과 함께 종료됐다.

경찰·검찰·법원의 법왜곡
 서울 서초구 대법원
ⓒ 연합뉴스
신씨 일가 사건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재심 재판을 받으며 1심에서 대법원까지 올라갔다(1차 재심). 이때는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라는 전제가 한층 약해져 있었다.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의 <형사재심의 현황과 운용방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재심 당시 신귀영은 '나는 조총련 간부가 아니었으며 신귀영에게 그런 지령을 내릴 지위에 있지 않았다'라는 신수영의 진술서를 확보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점은 여전히 시정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1999년부터 2004년 기간에도 1심에서 대법원까지 올라가며 또다시 재심을 받았다(2차 재심). 하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한 사건을 놓고 1심에서 3심에서 올라가는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됐는데도 허술한 그 전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진실은 결국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밝혀졌다. 이 위원회는 2007년 1월 23일에 경찰·검찰은 물론이고 법원의 잘못까지 지적하면서 "국가는 수사 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및 가혹행위에 기한 허위 조작, 자백에 의존한 무리한 기소 및 유죄판결 등에 대하여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권고했다.

결국 법원도 진실을 받아들였다. 3차 재심을 맡은 부산지방법원 형사6부는 2009년 8월 21일 무죄를 선고하면서 판결문 외에 별도의 사과문을 작성했다. 법원은 "불법 구금과 고문에 이은 유죄 인정으로 피고인들이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받은 데 대해 만시지탄이지만 진심으로 사과한다"라며 국가를 대표해 사과했다. 검찰이 항고하지 않아 이 재판은 여기서 끝났다.

독재정권 시절의 간첩조작사건이라고 해서 재판부가 반드시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은 아니다. 조봉암이나 김대중 같은 인물이 관련된 사건에서는 재판부의 자율성이 크게 위축됐지만, 일반 국민들이 간첩으로 몰린 사건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사건에서 법원이 양심껏 재판하면 공안기관과 얼굴을 붉힐 수는 있어도, 반드시 정권의 보복까지 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면, 사건을 부실하게 조작한 공안기관이 오히려 청와대 호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상당수의 간첩조작사건은 경찰·검찰·법원의 삼위일체 법왜곡에 기초했다. 직권남용죄가 있었는데도 오랫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직권남용죄보다 강력한 법왜곡죄를 꺼내 드는 것은 그리 과하지도 않고 이르지도 않다. 이 역시 "만시지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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