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버린 아버지 마주한 딸, 뻔하지 않은 이들의 결말
[고광일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센티멘탈 밸류>를 스쳐 지난 건 지난가을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사랑할 때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라는 믿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이라는 성취에 혹하기는 했지만 작품소개에서 방지턱을 만났다. 오래전 집을 떠난 아버지와 두 자매의 만남. 보지 않아도 어떻게 진행될지 눈에 그려지는 소재. 마침, 같은 시간대에 GV까지 있던 기대작 <여행과 나날>의 취소 표가 나왔다. 그렇게 <센티멘탈 밸류>의 관람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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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틸컷 |
| ⓒ 센티멘탈밸류 |
노년이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는 정체 모를 내레이션은 고조할아버지부터 6대에 이르는 장구한 가족사를 관통한다. 이후 내레이션은 쓰이지 않는데 이 영화가 특정인의 가족사이며 동시에 보편성을 띠는 이야기임을 각인한다. 집의 독백이라 부를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주인공 노라(레나테 레인스베)가 등장한다. 국립극장에서 주연을 맡을 정도로 성공한 연극인이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대기실에서 나오지 않아 연출부의 애를 태우던 노라는 동료 배우에게 뺨을 때려달라기도 하고 비상구로 달아나다가 급기야 의상을 제 손으로 북북 찢기도 한다. 놀란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겨우 그녀를 진정시키고 검은색 테이프로 찢어진 드레스를 긴급 수선한 뒤에야 겨우 무대에 오르는 노라. 불안한 표정으로 관객과 마주한 그녀는 연기가 시작되자 언제 무대공포증 같은 게 있었냐는 듯 몰입하고, 기립박수와 함께 커튼콜을 마친다.
이제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의 등장 차례. 장녀 노라와 차녀 아그네스의 엄마이자 구스타브의 아내였던 세실의 장례식.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그는 집에서 열린 추모식에 갑자기 등장한다. 영화제에서 50주년 회고전을 할 만큼의 거장이지만 가족들에게는 냉정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떠난 후 마음의 상처가 컸던 노라에게 구스타브는 새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달라며 대뜸 시나리오를 건넨다. 너를 생각하며 쓴 시나리오니 제발 한 번만 읽어보라지만, 과거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노라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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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틸컷 |
| ⓒ 센티멘탈밸류 |
인생을 더 살아온 구스타브라고 다르지 않다. 예술로의 도피는 그가 먼저 찾은 탈출구였다. 그는 연극배우인 딸 앞에서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배우의 눈빛도 볼 수 없고 클로즈업도 없다는 이유다. 편집 없이 실시간으로 마주해야 하는 시간은 그에게 무의미해 보인다. 정돈된 컷이 필요한 그에게 육아와 부부 생활이란 편집할 수 없는 일상은 무가치함의 연속이었을지 모른다. 손자인 에리크에게 컷을 이어 붙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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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틸컷 |
| ⓒ 센티멘탈밸류 |
영원히 밀어낼 거 같던 둘의 중재가 되는 건 차녀인 아그네스다. 역사학자이기도 한 아그네스 또한 구스타브를 탐탁잖게 여기지만 대화의 여지는 남긴다. 구스타브는 아그네스의 아들인 에리크에게도 출연 제의를 한다. 어린 시절 구스타브의 영화에 출연하고 '우주의 중심'이 됐던 아그네스는 이후 버림받은 상처가 떠올라 에리크의 출연을 반대한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노라에게 그랬든 사과 한마디 없이 시나리오만 그저 한번 읽어보라며 두고 훌쩍 자리를 뜬다.
아그네스는 시나리오를 읽고서야 왜 아빠가 노라에게 그 역을 맡기고 싶어 하는지 깨닫는다. 아그네스는 그 길로 언니를 찾아간다. 공연도 취소하고 잠적하던 노라에게 제발 한 번만 시나리오를 읽어달라며 부탁하고, 그것도 싫으면 대사 한 부분만 읽어달라고 애원한다. 공교롭게도 그 부분은 레이첼이 구스타브 앞에서 리허설을 했던 부분. 레이첼은 구스타브에게 도저히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떠나며 노라에게도 꼭 그 역할을 맡아달라며 부탁한 상태다. 노라는 마침내 아버지가 쓴 대사를 소리 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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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틸컷 |
| ⓒ 센티멘탈밸류 |
극중극 형식인 영화의 마지막은 구스타브의 영화제작 현장이다. 가족들의 오래된 집이 영화에 어울리게 리모델링되는 장면 다음이다. 노라는 결국 배역을 수락했고 아그네스의 아들이자 노라의 조카인 에리크도 출연한다.
노라는 연기에 대해 "다른 사람이 되어 그 감정을 느끼는 게 좋다"면서, "그렇게 내 감정도 더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노라는 이제 아빠와 눈을 마주치며 컷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연극 같은 롱테이크를 끝낸 구스타브는 감독 의자에 앉아 노라를 바라본다.
동시에 카메라 앵글이 부감으로 바뀐다. 로케이션일 줄 알았던 집은 세트장이었다. 담담한 관찰이었던 내레이션("집이 소음보다 더 싫어한 건 침묵이었다"). 아그네스가 제발 읽어보라고 했던 평이한 대사("혼자서는 못해요, 나에게는 집이 필요해요")의 의미가 이제 변한다. 촬영이 끝난 세트는 스태프들이 만드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다. 예술로 도피했던 두 사람은 집이 아닌 곳에서 만나 이제 한 가족의 센티멘탈 밸류를 만들어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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