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들썩였던 고개, 흔적 없이 사라진 이유

조종안 2026. 3. 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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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역사' 고스란히 간직한 군산 팔마재 이야기

[조종안 기자]

전북특별자치도 군산(群山)은 나지막한 산들이 무리를 이루는 항구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고개'도 많다. <한국지명유래집>(2010)에 소개된 고개는 모두 100여 개. 그 중 원도심권에만 해망령(월명공원), 서낭당고개(형무소고개), 산끊어진고개(선양동고개),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 둔뱀이고개(군청고개), 동령고개(동령길), 대재(竹城), 팔마재(八馬峙) 등이 있었으나 근대화의 급물살 속에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다.
 최근의 팔마광장(팔마 교차로), 전군도로 시작점이기도 하다.
ⓒ 조종안
군산시 동흥남동(東興南洞)은 흥남동에서 담당하는 여섯 개 법정동 중 하나로, 흥남동의 동쪽 지역을 일컫는다. '흥남'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940년대 초 군산부 남둔율정(南屯栗町) 지역이 광복 후(1946년) 흥남동으로 개편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흥남동은 1954년 동흥남동과 서흥남동으로 나뉘어 오늘에 이른다.

예로부터 흥남동 일대를 '팔마재'라 하였다. 팔마광장(교차로)과 팔마산(43.7m)도 그에 속했다. 팔마산은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였으나 198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도시화 됐다. 팔마(八馬)는 지형이 마치 여덟 마리 말이 뛰는 형국이라서 붙여졌다고 전한다. 이곳에 재(峙, 고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1920년대) 팔마산은 헐벗고 굶주린 조선인 800여 명이 옴닥옴닥 모여 사는 빈촌이었다. 해발 50m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구릉지임에도 비좁고 가파른 오르막길인 데다 가로등이 설치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 거치면서 피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새벽마다 쌀 시장 섰던 팔마재
 군산선(왼쪽)과 옥구선(오른쪽). 건널목 주변은 새벽마다 쌀시장 섰던 ‘팔마장터’였으며, 군산의 관문이자 전군도로 시작점이기도 했다.
ⓒ 조종안
그 옛날 팔마재는 서래장터(경장시)와 함께 이용되던 장터였으며, 군산선(23.1km)과 옥구선(11.8km) 철도가 분기 되는 지점으로 군산의 관문 역할을 하던 역사적인 장소다. 만경강 물줄기와 이어졌던 경포천이 강심을 따라 중동 쪽으로 내려가고 이곳에는 날마다 새벽이면 철도 건널목 중심으로 '쌀 시장'이 섰던 것. 일명 '팔마장터(새벽 쌀시장)'이다.

군산선(군산-익산)은 호남선 지선으로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본토로 빼돌리기 위해 1912년 3월 완공하였고, 옥구선(군산-옥구)은 군산선 지선으로 미군(유엔군)에 의해 1953년 개설된 철도로 기록에 나타난다.

팔마 장터는 옥산, 회현, 대야, 미면 등지에서 쌀과 나락을 소 달구지에 바리바리 싣고 모여들어 정미소와 수레바퀴 수리소가 많았다. 도선(군산-장항) 운항이 활발했던 1950~1960년대에는 충남 서천, 화양을 비롯한 금강 연안 농민들도 이곳 '쌀시장'을 이용했으며, 새벽이면 무명 옷 차림의 촌로들과 하얀 김을 내뿜는 마소, 달구지가 뒤엉켜 장관을 이루었다.

본래 팔마재는 직선으로 뻗은 전군도로 좌우로 들녘만 보였으나, 1960년대 후반 외항과 연결되는 산업 도로(해망로)가 뚫리고, 1977년 9월 전군도로가 4차선 확장과 함께 고가도로(2008년 철거)가 설치되면서 로터리(팔마광장)가 생겨났다. 그 후 주변에 3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광장에는 오색 무지개가 아름다운 분수대와 시계탑이 세워졌으나 승용차 보급률이 급속도로 증가하던 1990년대 중반 철거됐다.

팔마산 목장승, 옥구선 공사 때 사라져
 한국민속촌에 설치된 서낭당과 5기의 목장승(1980년대)
ⓒ 조종안
일제가 호남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 수탈을 목적으로 1908년 개설한 전군도로(번영로)는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로 알려진다. <경향잡지>(1935년 10월호)는 신작로를 '대한길'로 표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팔마재를 넘어가는 사람이면...'이라는 대목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당시엔 재(고개)가 존재하였고, 많은 길손이 오갔음을 암시하고 있어서다.

옛 노인들의 구술도 <경향잡지>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1935년 일제가 만든 <군산부지도>에서도 팔마산 줄기가 지금의 아흔아홉다리(경포천) 근처까지 길게 뻗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해 일본인이 집필한 <군산개항전사>(군산부 발행)는 "팔마산에는 20~30기에 이르는 장승이 나란히 서 있었다"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예로부터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으며, 대부분 마을 어귀 서낭당 부근에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다. 남녀 장승에는 각각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 새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장승은 간절한 소망과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마을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 표시나 이정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군산개항전사>는 1935년 당시에도 "서방축귀백제대장군, 동방축귀청제대장군(西方逐鬼白帝大將軍, 東方逐鬼靑帝大將軍)"이라 새겨 있는 장승이 15기 남아 있다고 부연 한다. 이로 미루어 팔마재 서낭당과 장승들은 길손의 이정표 역할은 물론, 지역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등 마을 공동 신앙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잡귀를 쫓아내고 마을의 안녕을 도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에 할퀴고, 미국에 찢기는 등 '오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팔마재(팔마산). 광복(1945) 후에도 고개는 존재하였고, 팔마산 줄기도 경포천 인근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1950~1953) 당시 미군에 의해 부설된 옥구선(군사용 철도) 공사 때 동쪽 능선 절반 가까이 잘려나가면서 고개와 나머지 목장승 15기도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 문헌]
- 디지털군산문화대전-흥남동(興南洞)
- <우리 고장의 지명유래-군산의 옛 지명을 찾아서>(2002 군산문화원)
- '팔마재(八馬峙)' 안내판
- 가톨릭 재단에서 출간한 <경향잡지>(1935년 10월호)
- <동아일보> (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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