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외우던 NPC는 옛말"…AI, 게임에 '지능' 불어넣다 [트랜D]
게임을 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존재가 있다. ‘논 플레이어 캐릭터(Non-Player Character)’, NPC다.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하지 않지만 게임 세계를 채우고 있는 모든 캐릭터를 뜻한다. 마을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 퀘스트를 주는 왕, 길을 안내하는 마을 주민, 함께 싸우는 동료 병사까지. NPC는 게임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플레이어에게 목표를 부여하며 가상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핵심 요소다. 게임의 재미를 완성하는 데 NPC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그런데 이 NPC가 지금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대사를 외우던 NPC, 대화를 시작하다
배틀그라운드에 새로운 동료가 등장했다. 이름은 ‘PUBG 앨라이(PUBG Ally)’. 글로벌 히트 게임 배틀그라운드에 추가된 인공지능(AI) 동료는 기존 NPC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플레이어의 음성 명령을 알아듣고 전술적 판단을 내리며, 상황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저쪽에 적이 있어, 엄호해줘”라고 말하면 즉시 엄호 사격에 나선다. 특정 아이템을 찾아달라 요청하면 스스로 지도를 탐색해 가져다준다. 음성 대화도 가능하고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까지 3개 언어를 인지한다.
이것은 단순한 신기능이 아니다. 시장조사업체 더비즈니스리서치컴퍼니(TBRC)에 따르면 AI NPC 시장은 2024년 14억 달러(약 2조517억원)에서 2029년 55억 달러(약 8조613억원)로 연평균 31.2%의 폭발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글로벌 게임 산업 규모가 2000억 달러(약 293조원)를 넘어선 가운데 지난해 기준 게임사 임원의 84%가 AI 도구를 사용하거나 테스트한 것으로 나타났다. 크래프톤·유비소프트·위메이드 같은 메이저 게임 퍼블리셔들이 앞다퉈 AI NPC를 자사 타이틀에 도입하고 있다. 수십 년간 같은 대사를 반복하던 NPC가 마침내 ‘지능’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NPC는 스크립트의 포로였다. “왕이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나도 한때는 모험가였지”와 같은 대사를 수십 년째 반복하는 게 전부였다. 플레이어가 무엇을 하든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존재였다. 마치 중세 갑옷을 입은 고장이 난 AI 스피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올해 생성형 AI가 NPC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유비소프트는 엔비디아와 협력해 스크립트 없이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기술을 개발했다. NPC는 자신만의 배경 스토리와 지식 기반, 고유한 대화 스타일을 갖췄다.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실시간으로 반응한다. 고전적인 방식의 NPC 동작 방식과 AI가 만들어내는 자발적 상호작용의 역동성을 결합한 게 핵심이다.

AI가 게임을 만드는 시대
흥미로운 사례는 추리 게임 ‘데드 미트(Dead Meat)’다. 올해 출시 예정인 데드 미트는 엔비디아의 아바타 클라우드 엔진 기술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플레이어는 용의자 NPC에게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고, NPC의 표정 변화와 말투에서 거짓말의 단서를 찾아 범인을 추리한다. “어젯밤 어디 있었냐”고 물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며 경계를 풀게 할 수도 있다. 같은 게임이지만 플레이할 때마다 대화가 달라진다. 때로는 NPC가 일부러 거짓말을 해 수사를 교란하기도 한다. 지난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된 CES 2025에서 데드 미트는 큰 주목을 받았다.
게임 NPC의 핵심 기술은 거대 언어 모델(LLM)의 경량화와 온디바이스 처리다. 소규모 개발사도 대형 스튜디오 수준의 AI NPC를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엔비디아는 음성 인식과 합성, 실시간 표정 애니메이션 생성 도구를 제공하며 언리얼 엔진 5 플러그인으로 개발자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더 나아가 NPC끼리 서로 대화하고 주변 사물을 인식해 상호작용하는 기능까지 구현됐다. 플레이어가 가만히 있어도 NPC들이 알아서 세계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게임 전문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한 게임 AI는 플레이어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환상과 몰입감을 만드는 역할이다.

AI의 영향은 NPC에 그치지 않는다. 게임 개발 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게임 플랫폼 스팀에서 지난해 출시된 신작의 약 20%가 생성형 AI를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게임을 만드는 핵심 엔진인 유니티와 언리얼은 텍스처 생성, 캐릭터 애니메이션, 음성 합성 등 AI 도구를 엔진 차원에서 통합 제공하기 시작했다. 과거 수백 명의 팀과 수천억원의 예산이 필요했던 AAA급 비주얼 퀄리티를 소규모 게임사, 1인 인디 개발자도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현실이 되고 있다.
텍스트나 이미지 한장만으로 3D 모델을 자동 생성하고 관절 움직임까지 구현하는 기술이 실제 대작 게임 개발에 투입되고 있다. AI 음성 합성으로 수백 명의 NPC 대사를 효율적으로 제작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게임의 흥행 가능성을 AI가 사전에 예측하는 시스템, AI로 플레이어의 부정행위를 탐지하는 보안 솔루션, 마케팅 도구에도 AI가 활용되고 있다. AI는 기획·아트·테스트 검수(QA)·라이브 서비스 운영 등 게임 제작의 모든 단계에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게임 커뮤니티의 반응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에게 게임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인간 크리에이터의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우의 목소리, 아티스트의 붓질, 작곡가의 선율에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AI NPC가 스스로 동작하며 게임의 흐름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거나 게임사가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아 몰입을 해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AI가 게임 제작 전반에 개입하는 흐름을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판단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한국 게임사, AI 전쟁의 최전선에 서다
국내 게임 산업은 이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게임업계의 생성형 AI 활용률은 41.7%로 콘텐트 산업 전체에서 가장 높았다. 게다가 게임 종사자의 72%가 AI를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AI 도입으로 업무 시간이 평균 32.4% 단축됐고 생산성과 결과물 품질도 30% 이상 개선됐다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했다.
물론 생성형 AI가 만든 콘텐트에 대한 게임 플레이어의 거부감이나 AI NPC의 예측 불가능한 발언으로 인한 서사 훼손 위험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럼에도 방향은 명확하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글로벌 게임 시장의 52%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AI 기술 격차는 곧 산업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 NPC가 대사를 외우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NPC는 대화하고 판단하며 학습한다. 게임이 AI의 가장 흥미로운 실험장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2026년의 흐름은 그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윤준탁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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