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개혁" 조희대의 반발... 지금이 1950년대인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
| ▲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2월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
| ⓒ 연합뉴스 |
현행 14명인 대법관 정원이 이번 개정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하게 됐지만, 이것이 상고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6명이라는 숫자는 1950년대 후반의 재판 수요에나 맞는 규모다.
'대법관판사'가 있었다?
1959년 1월 13일 개정된 법원조직법 제5조 제1항은 "대법원에는 대법관 및 판사를, 고등법원·지방법원에는 판사를 둔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 구성원은 대법관과 대법원판사로 이원화됐다. 이 이원화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상고심에 대한 당시의 수요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헌법 제72조 제11호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법관을 임면한다고 규정했다. 대법원판사에 관해서는 이런 헌법 규정이 없었다. 이로 인한 위상의 차이에 더해 권한의 차이도 있었지만, 대법원판사 역시 대법관과 함께 대법원의 재판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대법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점은 사법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1995년에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 역사서인 <법원사>는 이승만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악에 맞서 싸운 국민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해 준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 사건은 피고인이 1959년 12월 11일 제1심 법원에서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시위에 대하여 경범죄처벌법과 도로취체규칙을 적용한 유죄판결을 선고받자 대법원에 비약상고한 사건으로서, 김연수 대법관(재판장), 사광욱·계창업·홍남표·김홍섭 대법원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였다."
1심 선고 뒤 항소심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에 곧바로 상고된 이 시국사건을 담당한 대법원 재판관 5인 중 넷은 대법원판사였다. 대법원판사가 80%나 참여한 상태에서 대법원판결이 나왔던 것이다. 이들이 대법관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대법원판사들의 이전 직책에서도 확인된다. 1959년 1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대법원판사로 내정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한성수는 법원행정처장이고 사광욱은 대구지방법원장이고 나항윤은 광주지법원장이고 최윤모는 청주지법원장이라고 소개했다. 지금의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관이 되기 직전에 거쳤던 직책이 대구지방법원장이다.
1959년 당시의 법원조직법 제5조 제2항은 "대법관의 원수는 9명 이내"라고 한 뒤 "대법원판사의 원수는 11명 이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판사의 직무가 대법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때의 대법관 정원은 실질적으로 20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9년 6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8년 말의 인구는 2190만 명이었다. 인구가 지금의 절반도 안 되던 시절에 대법원 재판부가 20명으로 구성됐다면, 대법관 정원을 26명으로 규정하는 이번 개정은 부족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재판 적체를 해소할 별도의 시스템이 마련됐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법관 증원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정이다.
법원조직법이 제정된 1949년 8월 15일 당시의 대법관 정원은 9명이었다. 이 숫자만으로는 상고심 수요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50년대의 한국 사회도 대법관 증원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당시의 국회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1958년 11월 20일 자 <동아일보>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대법관 정원을 15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바로 이때 사법부 지도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가장 격렬히 반대한 인물이 조용순 대법원장이다. <사법> 2021년 제55호에 실린 공두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 '대법원의 조직과 상고제도의 변화'는 국회 법사위 의결 직후에 보여준 조 대법원장의 저지 활동을 이렇게 정리한다.
"조용순 제2대 대법원장은 공개적으로 대법관 증원안을 반대하였다. 1958. 11. 21. 오후에 즉시 긴급 대법관회의를 소집하고 '대법관 증원 문제를 토의한 후 대법관을 현재 이상으로 증원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합의를 보았다'라고 발표하면서, 대법원판사제를 채택하여 11명을 증원하는 것이 대법관 6명을 증원하는 것보다 사건 처리에 효과적이므로 앞으로 계속 국회를 설득하여 대법원판사제 도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대법관을 증원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대법관 합의를 보았다면서도, 사건 처리를 위해 대법원 구성원을 11명 더 늘리는 방안을 타협안으로 내놓았다.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조용순 대법원장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법관 증원을 반대했던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 많았지만, 조용순의 저지투쟁은 성공을 거뒀다. 자유당 정권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김철안 의원 등 자유당 의원들이 1958. 12. 24 국회 본회의에서 다시 대법원판사제를 골자로 하는 수정안을 제출하였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대법관을 늘리라는 사회적 요구에 맞서 '대법관 정원을 동결하는 대신, 대법원판사제를 신설'하는 타협안을 내세우는 전략이 성공을 거뒀던 것이다.
임명 과정에서 국회나 행정부가 개입하는 대법관이 많아지면 사법부에 대한 외부의 입김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는 사법부의 위상을 위축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사법부의 위상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부가 본연의 역할인 재판 서비스 수요에 제대로 부응하는 것이다.
이 같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먼저 갖춘 다음에 법원의 위상을 생각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그런데 당시의 대법원은 자신들의 위상을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대법관과 대법원판사를 이원화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사법부의 그 같은 이기주의는 지금처럼 대법관 정원이 14명이었던 1990년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대한변호사협회는 대법관 정원을 21명으로 늘리는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에 맞선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심의관실의 대응은 그런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위의 <법원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법정책연구심의관실에서는 대법관의 증원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표시하였다. 대법관의 증원은 대법원의 지위 격하, 권위 상실, 최고법원성(性)의 몰각 등을 초래할 수 있고, 또한 사건 수에 맞추어 계속적으로 대법관 수를 증가시킨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고 대법원이 법률문화의 선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견해였다."
|
|
| ▲ 대법원의 모습. |
| ⓒ 이정민 |
당시 대법원 민사부에는 대법관 4인과 대법원판사 6인이 있었다. 그런데 법규에 의해 대법관 5인이 참여해야 하는 사건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럴 때는 변칙이 동원됐다. 위 공두현 논문은 "대법관 5인만으로 부를 구성해야 하는 소송물 가액 500만환을 넘는 민사사건 등을 심리할 때에는 형사부 대법관 2인을 민사부에 추가"했다고 기술한다.
형사부 대법관은 셋이었다. 사형·무기징역·무기금고를 선고해야 하는 사건이 들어오면 이 부서는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대법관 5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부서의 대법관들이 형사부에 품앗이를 해주러 갔다. 처음부터 대법원판사가 아닌 대법관을 증원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이다.
이 같은 이원화 상태는 4·19 혁명 직후에 해소되고, 그 뒤 대법관 정원이 조금씩 늘어났다. 1963년에는 대법관을 대법원판사로 개칭하고 대법원장 이외의 대법원판사를 12명 두도록 했다.
위와 같이 1950년대 후반에도 대법관 20명으로는 상고심 수요를 제대로 충족하기 힘들었다. 이를 감안하면 대법관 26명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사법부 지도부의 위상보다 재판 서비스의 원활화를 먼저 생각해야 할 때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쌍방울 핵심 관계자 "박상용 검사, 이화영 좀 빨리 설득하라더라"
- 이란 최고지도자 제거? 미국은 이것을 무너뜨렸다
- '조희대 탄핵' 여론전 돌입한 범여권... "역겹다" 자진 사퇴도 압박
- 윤석열 '12·3 비상계엄, 전두환 쿠데타와 달라'
- 남기업 "5월 9일 이후 보유세 강화 로드맵 나올 것"
- '비대칭적 인내'로 주변국 공격하는 이란, 버티는 걸프 국가... 왜?
- 장동혁에 두 손 든 국힘 개혁파 "절윤·화합 요구했지만 입장 차"
- 조희대, 이제 여론조사까지 왜곡하나
- "새벽 3시부터 굴 까도 월 23만원"... 현대판 노예제 의혹 공방
- "젠더폭력 기사, 여전히 선정적이고 여성 취재원 비중도 낮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