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 때도 6.7조 ‘순매수’…연기금, 폭락장 구원투수 나설까
‘저가 매수’ 타이밍 저울질 가능성 커
금융당국 “증시, 추세 하락 가능성 낮아”

6000선을 넘어 7000선을 바라보던 코스피가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며 5000선 부근까지 밀리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에 원·달러 환율이 장중 1500원을 넘어서자 투자심리가 급랭하며 투매 현상이 나타났다. 지수가 속수무책으로 밀리자 투자자들의 시선은 다시 ‘연기금’으로 향하고 있다. 과거 패닉장이 올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던 만큼 이번 폭락장에서도 연기금이 ‘소방수’ 역할을 재현할지 시장의 관심이 쏠린다.
연기금, 국내증시 급락 때 구원투수로 등판 경험
4일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연기금은 이날 유가증권 시장에서 727억원, 코스닥 시장에서 97억원 매도우위를 기록했다. 코스피가 이날까지 이틀 동안 1150.59포인트(5093.54에 마감) 빠지며 역대 최대 낙폭을 연일 경신했음에도 ‘구원투수’의 본격적인 등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이 연기금의 매수 전환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과거 증시가 심리적 패닉에 빠질 때마다 국내증시의 구원투수로 등장해 시장을 지탱해온 경험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비상계엄 사태 이후 탄핵 선고까지의 시기다. 한국거래소 집계에 따르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다음 날인 12월4일부터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2025년 4월4일까지 80거래일 동안 연기금은 유가증권 시장에서만 약 6조7300억원을 순매수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약 14조원을 순매도하며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특히 국내 정치적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던 2024년 12월 한 달 동안 연기금은 유가증권 시장에서 약 2조3400억원을 사들이며 외국인과 개인의 투매 물량을 받아냈다. 당시 외국인과 개인은 같은 기간 각각 3조4800억원, 8000억원가량 순매도에 나섰다.
연기금의 증시 버팀목 역할은 이때만의 일이 아니다. 그보다 앞선 2019년 미·중 무역전쟁과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도 연기금은 10개월 가량 연속 순매수를 이어가며 증시 하단을 떠받쳤다.
목표 비중 상향에 ‘리밸런싱 유예’까지…‘저가 매수’ 타이밍 저울질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연기금이 구원투수로 등장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올해 초 국내 주식 투자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근거로 꼽힌다.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월26일 회의에서 올해 말 국내 주식 목표 비중을 기존 14.4%에서 14.9%로 0.5%포인트(p) 상향 조정했다. 당초 해외 비중을 더 늘리려던 계획을 일부 수정해 국내 증시 비중을 높이기로 한 것이다.
또 전략적 자산배분(SAA) 리밸런싱을 일정 기간 유예해 국내 주식 비중이 허용 범위(±3%p)를 다소 넘더라도 기계적으로 매도하지 않도록 하는 방침도 함께 결정했다. 폭락장에서 연기금이 규정상 매도에 나서며 오히려 하락 압력을 키우는 ‘자동 매도’ 상황을 사전에 완화한 셈이다.
기금 운용 규모가 1450조원을 넘어선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은 지난해 말 기준 약 18.1%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지수가 급락하면서 시가총액이 크게 줄어든 점을 감안하면, 목표 비중(14.9%)과 허용 범위 등을 고려할 때 추가로 투입할 수 있는 자금 여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는 평가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현 정권의 금융시장에 대한 기조와는 별개로 연기금은 국내 증시의 대표적인 장기 투자자로서 밸류에이션이 과도하게 낮아진 구간에서는 순매수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이미 제도적으로 리밸런싱 압박을 풀어놓은 만큼 외국인의 패닉 셀이 진정되는 시점에 맞춰 연기금의 본격적인 ‘순매수’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완화되는 과정에서 연기금의 저가 매수와 수급 지지가 확인될 경우, 이를 계기로 외국인 투자심리가 개선되며 증시 반등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한편,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전일과 이날 이틀 연속 긴급 금융시장 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주식시장 동향을 24시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필요 시 ‘100조원+α 규모의 시장안정 프로그램’을 적극 가동할 것을 지시했다.
임성영 기자 rssy0202@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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