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m 거대한 실험… 바다 위 AI, 항로를 설계하다

박장군 2026. 3. 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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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 에메랄드호 부산 탑승기
‘자율운항’ 파일럿 선박의 대표
‘하이나스 컨트롤’이 뱃길 권고
자동 회피 능력은 또 다른 강점
지난달 26일 부산 중구 HMM 선박종합상황실 대형 스크린에 선박들의 위치와 기상 상황 등 각종 정보가 띄워져 있다. 이곳은 선박과 육상을 실시간으로 잇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부산신항의 아침 공기는 매서웠다. 분주히 오가는 갠트리 크레인과 하역 인부들 사이로 길이 335m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형 컨테이너선 HMM 에메랄드호였다. 20피트 컨테이너 1만3000개를 싣고 달릴 수 있는 이 배는 축구장 3개 크기 면적으로 이미 유명하지만, 단순한 화물선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최적의 항로를 알아서 계산하고, 스스로 파도를 가르는 ‘자율운항’ 파일럿 선박의 대표 격이기 때문이다.

HMM 에메랄드호 박상현 선장이 선교 해도실에 설치된 자율운항시스템 '하이나스 컨트롤'을 마우스로 조작하는 모습.


“굿모닝, 썰”. 가파른 현문 사다리를 딛고 배에 오르자 필리핀 선원이 인사를 건넸다. 자율운항시스템을 볼 수 있는 브릿지(선교)는 아파트 10층 높이에 있다. 23년 경력 박상현 선장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브릿지에 들어서자 널찍한 모니터 화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도실 한편에 자리 잡은 자율운항시스템 ‘하이나스 컨트롤’이었다. 하이나스 화면에는 북태평양 해도 위에 30여개 점을 찍어 둥그스름하게 이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부산에서 미국 서안 롱비치항까지 가는 2주 동안 하이나스가 직접 권고한 뱃길이었다.

HD현대의 자회사인 아비커스가 만든 하이나스는 항로 추천 이외에도 구간별 선속, 예상 연료 소모량도 실시간 예측이 가능하다. 전태영 이등항해사가 선박 일정에 맞춰 출항지와 입항지 사이의 좌표를 집어넣자 그사이 만나게 될 바람, 파도, 조류 등 기상 정보가 실시간으로 반영돼 종합됐다. 속력을 바꾸기 위해 직접 다뤘던 엔진 RPM 레버도 하이나스가 권장한 선속에 맞춰 자동으로 움직인다.

특히 이 시스템은 연료 소모량 계측과 온실가스 배출 최소화에 최적화돼있다는 게 승조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선장이 직접 계획한 선속보다, 하이나스가 권고한 선속에 따라 운항했을 때 더 효율이 높았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체감한 효과는 데이터로도 축적되고 있다. 4일 HMM에 따르면 이 배는 하이나스가 설치된 2024년 11월부터 현재까지 2.5∼4.5%의 연료 효율과 탄소 저감 효과를 보였다. HD현대도 하이나스 설치 선박이 그동안 1만㎞ 대양을 자율운항으로 횡단하는 과정에서 5%가량 연료를 절감하고, 온실가스 배출도 줄였다고 밝혔다. 박 선장은 “데이터를 계산하고, 그에 기반해 스스로 움직이는 거라 휴먼 에러를 크게 줄일 수 있다”며 “해양환경 보호에 일조하는 배를 운항한다는 자긍심도 크다”고 말했다.

자동 회피 능력은 이 배의 또 다른 강점이다. 주변 선박, 암초 등 위험물을 알아서 탐지해 안전하게 피해갈 수 있다. 선교 바로 위 톱 데크에 설치된 하이나스 카메라 덕분이다. 3개씩 설치된 광학, 적외선 카메라가 낮과 밤 사람의 눈을 대신한다. 최대 탐지 거리는 180도 반경 20해리(약 37㎞)에 달한다. 작은 어선처럼 레이더로 잘 감지되지 않는 선박에 대해 즉각 경보도 울려줘 빠르고,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된다는 게 항해사들의 설명이다. 후방 등 360도 견시 기능도 기술적으론 이미 가능해 곧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다만 아직 최종 결정의 키는 선장과 당직 항해사가 쥔다. 항로에서 마주치는 배가 2∼3척 정도로 적을 땐 하이나스가 알아서 피해가도록 놔두되 끝까지 감시하고, 통행량이 많아지면 항해사가 직접 조타수에게 변침 명령을 내린다. 돌발 변수로 가득한 바다에서 경험 많은 항해사의 판단과 조선술은 아직 AI로 대체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여전한 것이다.

부산신항에 떠 있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HMM 에메랄드호.


부두를 떠나 찾은 HMM 선박종합상황실은 하이나스의 연장선에 있었다. 부산 중구 원도심 한복판에 있는 이곳은 망망대해 위 선박과 육상을 연결하는 컨트롤타워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는 전 세계 바다를 항해 중인 HMM 배들의 위치가 삼각형으로 표시돼 움직였다. 배 내부 CCTV나 전자해도 화면, 화물 적재 현황도 위성인터넷을 타고 이곳에 그대로 띄워졌다. 영상·음성·텍스트 등 9000여개 파라미터(매개변수)가 분 단위로 수집된다고 한다. 변상수 HMM 오션서비스 해사디지털팀장은 “HMM 43척의 배가 상황실에 연결돼 있고, 올해 연말까지 60척으로 확대할 계획”이라며 “HMM은 이미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스마트십 과정을 지나 자율운행 초기 단계도 넘어섰다”고 말했다.

관건은 운항의 최종 통제권을 상황실이 언제쯤 넘겨받느냐에 맞춰진다. 단순히 현황을 공유받는 차원을 넘어 상황실이 선박 운항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다. HMM은 올해 총 40척 선박에 하이나스를 탑재한다는 계획인데 이 경우 상황실에서 직접 조타와 선속 조절이 가능해진다. 덴마크 머스크 등 선사들은 이미 육상이 선박 운항의 우선 통제권을 넘겨받은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HMM이 목표로 하는 ‘디지털 트윈’(현실 세계를 디지털 세계에 쌍둥이처럼 구현하는 것)까지 구체화되면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다만 업계에선 무인화를 의미하는 완전 자율운항에 대해선 아직 회의적인 시선이 강하다. 혹시 모를 보안 위협이나 화주의 신뢰도를 고려할 때 잠재적 리스크가 있다는 취지다.

이튿날 오전, HMM 에메랄드호는 다음 기항지인 롱비치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도착 예정 시각은 오는 13일 새벽 3시다. 거센 파도를 뚫고 태평양을 건너는 내내 AI 알고리즘이 항로를 계산하고, 스마트 센서가 선박 상태를 감시해 선원들의 항해를 도울 것이다. 대한민국 수출 최전선에서 펼쳐지는 자율운항 실험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부산=글·사진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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