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세 번 고개를 숙인 이유... 내가 한국인임을 깨달았다

김용국 2026. 3. 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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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국의 오사카 생존기] 일본에서 만난 한국② 일본 생활 중 한국인임을 깨닫게 한 장소 세 곳

도톤보리, 글리코상, 타코야키, 유니버설스튜디오, 우메다, 난바.... 오사카, 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입니다. 오사카라는 지명 뒤에 무슨 말이 가장 어울릴지 AI에게 물었더니 '여행'이라고 답을 합니다. 여기, 오사카 여행이 아닌 오사카살이를 시작한 특이한 중년 남성이 있습니다. 마천루가 즐비하고 네온사인과 휘황찬란한 불빛을 자랑하는 오사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오사카 주민으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독거 일기를 시작합니다. 반년간 펼쳐질 좌충우돌, 실수 만발 오사카 생존기를 시작합니다. <기자말>

[김용국 기자]

 일본에는 편의점보다 훨씬 많은 신사가 있다. 사진은 가나자와시의 오야마신사로, 일본·중국·유럽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신문(神門)으로 유명하다.
ⓒ 김용국
일본은 신사의 나라다. 일본 전체 편의점(5만여 개)보다 신사가 3배가량 많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하긴 골목길, 주택가에서도 크고 작은 다양한 신사를 볼 정도니까. 역사적 인물부터 신화 속 존재, 동물, 자연 등 수십만 수백만의 신을 모신다고 하니, 우리와는 사뭇 다른 문화이다.

신사 방문 시 예법이 있다. 신사에 들어갈 때 고개를 숙인다거나 입구에서 물로 입과 손을 정화를 한 뒤 본당에 절을 하고 퇴장 시 다시 목례를 하는 방식 등이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일본인이 아닌 바에야 신사 안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정도면 무난하지 않나 싶다.

그런 내가 두 달간의 일본 생활에서 고개를 숙인 적이 있다. 그것도 무려 세 차례나. 모두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 1970년 추모비 건립 당시 공원 바깥에 세워졌다가 재일동포들과 일본 시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99년에서야 지금의 위치(히로시마 평화공원 내)로 들어왔다.
ⓒ 김용국
1월 중순, 우연찮게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꼭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원폭돔과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 그러고 보니 10년 전쯤 나가사키 여행 때도 평화공원과 원폭자료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한자로 '추도 나가사키 조선인 희생자'라고 쓰인, 한쪽에 있는 작은 위령비 하나를 발견했다. 조선인 1만 5000명(추정)이 목숨을 잃은 현장에 추모 시설은 그것이 전부였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추모에서도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마에서도 감정은 다르지 않았다. 원폭돔을 지나 10분여를 걸어가니 평화기념공원이 있었고, 한쪽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보였다. 비석이 공원 내에 세워지기까지 사연도 기구했다. 1970년 추모비 건립 당시 히로시마시가 '공원 내 위령비 건립 불허' 입장을 고수하여 공원 바깥에 세워졌다. 그러다가 재일동포들과 일본 시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99년에서야 지금의 위치로 들어왔다고 한다. 진정으로 추모하고 있다기 보다는 마지못해 공간을 내준 느낌이랄까.
▲ 히로시마 원폭돔 히로시마 원폭돔이 세계유산임을 홍보하는 안내판이 여러 나라 언어로 소개되고 있다.
ⓒ 김용국
1945년 두 차례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 후 일본은 자국민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피해'만 줄곧 강조한다. 한국·조선인 사망자도 4만~5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외면하거나 감추려고만 한다. 이들은 일제에 강제동원 되었거나 생존을 위해 타국살이를 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떴다. 이들의 영혼은 누가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원폭돔 앞의 설명도 다소 실망스러웠다. 원폭돔이 '세계유산'이라는 사실만 여러 나라 언어로 장황하게 강조하고 있을 뿐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앞으로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성이나 참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원폭돔은 단순한 관광명소가 아니지 않은가.

그날 추모비 앞에서 일본 생활 처음으로 머리를 숙여 동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해마다 8월 5일이면 동포들이 위령제를 연다고 한다. 이들의 희생과 죽음이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장지
▲ 이시가와현 전몰자 묘지 가나자와시 소재 윤봉길 의사 암장지 바로 위에는 전몰자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침략전쟁에 나섰다 사망한 군인들의 묘지는 양지 바른 곳에 잘 관리되어 있는 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한 조선 청년 윤봉길의 주검은 한쪽 구석에 암매장되어 있었다.
ⓒ 김용국
2월에는 출장 관련으로 가나자와시에 가게 되었다. 가나자와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도시 전체가 역사 문화 예술 공간이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강력 추천하는 도시이다.

한국인이라면 가봐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이곳이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외관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가나자와역 바로 앞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노다야마(野田山)라는 지역에 내려서 다시 30분 정도 산길을 걷다 보니 공원묘지다. 묘가 수만, 수십만 기는 되어 보였다. 관광객은커녕 현지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겨울인데도 땀이 흐른다. 눈이 녹지 않은 2월 중순, 일본 외곽 산자락 어딘가에서 구글 지도에 의존해서 20세기 조선 청년의 마지막 모습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까.

몇 차례 같은 길을 오가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찾았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의사가 조국을 떠나며 남긴 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올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태극기와 한국 소주도 보인다. 기쁨보다는 참담함이 앞선다. 이런 외진 곳에 시신을 매장했다니. 아니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 가나자와시 윤봉길 의사 암장지 일제가 1932년 윤봉길 의사를 총살형 집행 후 시신을 묘비 없이 암매장한 장소다. 1946년 유해가 발굴된 이곳은 일본군 묘지 옆 쓰레기 하치장 부근 길가였다.
ⓒ 김용국
 가나자와시 윤봉길 의사 암장지
ⓒ 김용국
스물넷 윤봉길은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상하이 승전 축하 행사장에서 물통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에 타격을 입히는 의거를 결행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5월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일본으로 압송, 11월 20일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된다. 12월 18일 다시 비밀리에 가나자와 육군 위수구금소(현 가나자와성 자리)로 이송되고, 다음 날인 12월 19일 윤봉길은 순국했다. 총살형 집행 후 일제는 시신을 묘비 없이 암매장해 버렸고 이 사실을 유족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일련의 행위는 다분히 국제사회 여론과 조선의 저항을 의식한 것이다.

해방 후 1946년 김구 선생 등이 유해 봉환 운동을 추진했다. 일본 당국의 비협조로 유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어렵게 찾은 유해발굴 장소는 일본군 묘지 옆 쓰레기 하치장 부근 길가였다. 그러니까 의사의 유해는 14년간 영문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방치되었다가 일본 패전 후 1946년이 되어서야 고국(효창공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암장지 바로 위에는 일본 전몰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침략전쟁에 나섰다 사망한 군인들의 묘지는 양지바른 곳에 잘 관리되어 있는 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한 조선 청년의 주검은 한쪽 구석에 방치되고 심지어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왔다니 참담한 심정이었다.

암장지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장소에 윤봉길 의사 순국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1992년 한국 대통령 방일을 계기로 만들어졌고 자원봉사자들이 암장지와 함께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방명록에 서명한 뒤 암장지와 순국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했다. 스물넷에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하이로 떠난 조선 청년은 거사 후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 오사카를 거쳐서 낯선 가나자와에서 생을 마감했다. 심정이 어땠을까. 당당하게 최후를 맞던 윤봉길 의사의 처형 장면 사진이 떠올랐다.

교토 귀무덤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교토시 히마시야마에 있는 귀무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가져갔다. 이것을 모아 묻어둔 곳이 귀무덤이다. 희생자는 교토에만 10만 명이 넘고 일본 전국을 합하면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 김용국
내가 사는 오사카 북부에서 교토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 남짓 거리이다. 주말이나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엔 가끔 교토를 찾는다. 그런데 가장 마음 불편한 곳이 있다. 바로 히마시야마에 있는 귀무덤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가져갔다. 훗날 이것을 모아 묻어둔 곳이 귀무덤이다. 교토에만 10만 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귀와 코가 묻혔고, 일본 전국을 합하면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귀와 코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코무덤인데 잔인함을 순화하기 위해 귀무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연구 내용도 있다).
위치는 국립교토박물관, 산주산겐도, 고다이지, 기요미즈데라 등 유명 관광지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더 가슴 아픈 건, 당시 조선 침략을 자행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모하는 신사인 도요쿠니 신사 바로 아래에 귀무덤이 있다는 점이다.
 귀무덤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조선 침략을 자행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모하는 신사인 도요쿠니 신사가 있다. 도요쿠니 신사에서 바라본 귀무덤(왼쪽).
ⓒ 김용국
내가 방문한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귀무덤에 예를 표하고 큰 길가 위쪽을 바라보니 100미터쯤에 도요쿠니 신사가 보인다. 신사에는 히데요시의 상도 있다. 신사에서 바라보니, 마치 히데요시가 죽어서도 귀무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인으로서 착잡한 심정이었다.

귀무덤은 철문으로 잠겨있었다. '참배를 원하면 사전에 교토시 문화재보호과로 연락달라'는 안내가 있지만 그건 개방 불가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교토시가 만든 한글 안내표지판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전형적인 특징인 애매모호한 설명이다. '역사의 교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귀무덤 앞에서 누가 무슨 교훈을 어떻게 얻어야 할까.

피해의 역사뿐 아니라 가해의 역사도 인정해야

예전에 어느 일본인과 인터넷상으로 한일 관계에 대해 논쟁하다가 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과거는 이제 덮자. 미래로 가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우리는 그동안 사과도 했고 보상도 했다. 우리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도대체 뭘 원하느냐.'

그때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수한 침략전쟁을 통해 세계를 제패하려 했던 나라의 국민과 단 한 번도 먼저 전쟁을 벌인 적이 없는 나라의 국민은 입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본이 역사상 '피해자'였던 순간은 극히 짧은 반면 '가해자'였던 기간은 상당히 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가해는 일관되게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아사히 신문>(2월 22일자)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전쟁의 가해와 마주할 때'라는 제목이었다. 기사는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노다마사아키의 견해를 빌려 "패전국 일본은 왜 침략전쟁을 부인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제국주의 시절 참전 일본군들을 인터뷰해 펴낸 <전쟁과 죄책>이라는 책에서 일본 정부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알기 전에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다', '침략전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자학사관은 인정할 수 없다' 등이라고 강변하고 과거를 부인함으로써 무엇을 잃어왔던가."

이 기사는 마지막으로 "전쟁이 기억에서 역사로 옮겨가는 가운데 가해는 사라져간다. 우리는 피해와 가해의 양쪽을 마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이런 기사를 일본 일간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찾은 히로시마 원폭 현장에도, 윤봉길 의사가 암매장당한 가나자와에도, 교토의 귀무덤에도 '가해자'로서의 사과나 반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본 정부도 학교도 자신들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설마,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가 세월 속에 영영 잊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진정한 평화나 화해는 반쪽 진실만으로는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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