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국땅에서 만난 한반도를 빼닮은 협곡

김봉석 2026. 3. 4. 11:3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파클레니차 국립공원에서 즈르마냐 협곡까지, 길 위에서 마주한 야행의 위로

2024년 5월, 안정을 뒤로하고 동반 퇴사한 40대 부부입니다. '조기 은퇴'라는 로망 너머의 치열한 현실과 길 위에서 마주한 삶의 가치들을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기자말>

[김봉석 기자]

렌터카 여행의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 밝았다. 다음날 오전이면 정들었던 시트로엥 DS4를 반납해야 한다.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아내는 평소보다 빡빡한 '라스트 스퍼트' 일정을 내밀었다. 부엌에선 아내의 분주한 샌드위치 제조 소리가 들리고, 나는 익숙한 손길로 고프로 카메라와 짐을 챙겼다.

이날 목적지들은 한국인들에게 그리 알려진 곳이 아니다. '요정의 숲' 플리트비체는 검색 한 번에 많은 정보가 쏟아지지만, 오늘 우리가 갈 파클레니차(Paklenica)와 즈르마냐(Zrmanja)는 국내 여행자들에게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입구가 어디인지, 길은 험하지 않은지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은퇴 후 우리가 배운 가장 큰 지혜는 '모르는 길을 즐기는 법'이다. 정보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선입견 없이 마주할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에,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동을 걸었다.

거대 바위산의 오케스트라, 파클레니차 국립공원

자다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50분을 달려 도착한 파클레니차 국립공원. 1949년,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벨레비트(Velebit) 산맥'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다.

비수기의 혜택은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다. 1인당 5유로의 입장료와 3유로의 주차비를 내자, 안내원은 좁은 산길을 따라 차로 2km를 더 올라가라고 일러주었다. 성수기라면 입구에 차를 대고 한참을 걸었을 길을 편안하게 차로 이동하며 '비수기 여행자'의 특권을 누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거대한 수직 암벽의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수천 년 동안 빗물과 지하수가 석회암 바위를 녹여내며 만든 깊은 골짜기는 마치 거인이 도끼로 산을 갈라놓은 듯했다. 계곡물 소리는 바위산에 부딪히며 거대한 울림통을 만들었고, 그 웅장한 화음은 자연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그 자체였다.
▲ 거인 앞에 선 이방인, 파클레니차와의 첫 대면.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마주한 수직 암벽의 위용. 인간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바위산이 렌터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압도적으로 환영해 주었다.
ⓒ 김봉석
이곳은 전 유럽 클라이머들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400개가 넘는 암벽 등반 루트가 산 곳곳에 뻗어 있다. 실제로 고개를 들어보니 아찔한 절벽 끝에 매달려 중력과 싸우는 클라이머들이 보였다. 은퇴 후 평탄한 길만 찾던 우리에게, 제 몸 하나에 의지해 수직의 삶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경외감을 넘어 묘한 자극을 주었다.
▲ 중력을 거스르는 열정, 수직의 삶을 오르는 사람들. 400개가 넘는 등반 루트를 가진 클라이머들의 성지답게, 깎아지른 절벽에 몸을 맡긴 이들이 보인다. 아래에서 줄을 잡고 위에서 바위를 타는 그들의 호흡이 적막한 산울림 속에 생동감을 더한다.
ⓒ 김봉석
'밀키스' 빛 계곡물과 아니차 쿡의 그림자
계곡을 따라 걷는 길, 물빛이 신비롭다. 석회 성분을 머금은 물은 햇빛 아래서 뽀얀 우유를 섞은 듯한 '밀키스' 색깔을 띠었다. 스위스 계곡에서나 보았던 그 영롱한 빛깔이 이곳 자다르 근교에도 흐르고 있었다.
▲ 석회가 빚어낸 영롱한 빛, 자연이 담은 밀키스. 뽀얀 우유를 섞은 듯 신비로운 빛깔을 띠는 계곡물. 석회암 지형이 만들어낸 이 비현실적인 색감은 차가운 공기와 어우러져 파클레니차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 김봉석
바위산 특유의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체감 온도는 영상 14도보다 훨씬 낮게 느껴졌다. 장기 해외살이의 짐을 줄이느라 등산화 대신 신은 일반 운동화가 문제였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밟을 때마다 발바닥에 피로가 쌓였다. 우리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파클레니차의 상징이자 712m 높이의 거대 암벽인 '아니차 쿡(Anića Kuk)' 근처까지만 발길을 옮긴 뒤,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 침묵하는 바위산이 건네는 무언의 위로. 거대한 바위산의 웅장함을 마주하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은퇴 후 비로소 마주한 광활한 자연 앞에서,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되었다.
ⓒ 김봉석
내려오는 길, 계곡 벤치에 앉아 아침에 싸 온 샌드위치를 펼쳤다. 플리트비체가 화려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면, 이곳 파클레니차는 날것 그대로의 야생성을 간직한 '자연인의 식탁'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상쾌한 산 공기와 피부에 닿는 서늘한 바람이 샌드위치의 소박한 맛을 특별하게 채워주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자연이라는 거대한 치유자가 우리를 어루만지는 기분이었다.
▲ 자연인이 된 기분으로 즐기는 식사. 힘차게 흐르는 물줄기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꺼내 든 샌드위치. 거친 야생의 숨결 속에서 먹는 소박한 식사는 지친 몸과 마음을 채워주는 가장 확실한 보약이었다.
ⓒ 김봉석
즈르마냐 협곡, 한반도를 닮은 대지의 곡선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차로 25분을 달려 즈르마냐(Zrmanja) 협곡 전망대로 향했다. 이곳은 독일의 국민 작가 칼 마이(Karl May)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서부 영화 시리즈 <윈네투>(Winnetou) 촬영지로도 유명하지만, 도로에 표지판이 작게 표시되어 있어서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보물 같은 곳이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린 끝에 마침내 주차장에 도착했다.
▲ 즈르마냐 협곡으로 향하는 길.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즈르마냐 협곡으로 향하는 길.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보물을 찾아가듯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여행의 묘미였다.
ⓒ 김봉석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올라가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푸른 강줄기가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협곡의 모양이 놀랍게도 '한반도 지도'를 빼닮아 있었다. 수백 미터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파클레니차의 요동치던 물줄기와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깊었다.
▲ 크로아티아에서 발견한 한반도, 즈르마냐의 곡선. 깎아지른 절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 한반도 지도를 빼닮은 협곡의 모양을 마주하니 낯선 이국땅에서 묘한 동질감과 감동이 밀려온다.
ⓒ 김봉석
이곳의 강물은 아드리아해로 흘러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숨을 고르는 듯했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른 물줄기가 만드는 대지의 곡선을 보고 있자니, 은퇴 후 우리가 겪어온 굽이진 시간들이 떠올랐다. 직선으로만 살아야 했던 직장 생활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우리만의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여정이 즈르마냐의 강물과 닮아 보였다.

자다르의 노을, 다시 태어난 바다 오르간의 선율

렌터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자다르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오후 4시 이후 주차비가 면제되는 행운을 안고 '바다 오르간'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몸을 낮추자 세상은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이라고 극찬했던 그 순간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바다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 UFO가 방문한 자다르? 일몰이 빚은 기적 같은 찰나. 붉게 물든 자다르의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묘한 구름 한 조각. 마치 UFO가 일몰을 구경하러 내려온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 렌터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해 준다.
ⓒ 김봉석
그 인파 속에서 낯익은 언어가 들렸다. 한국 관광객들이었다. 타지에서 만난 동포가 반가워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는 척은 못 했지만, 마음속으로 그들의 여행에도 평화가 깃들길 빌어주었다.

저녁이 되자 바람은 매서워졌고 입에선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추위 덕분에 아내와 나는 더욱 밀착했다.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바라보는 자다르의 노을.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르겠지만, 우리 부부가 함께 만든 이 3일간의 렌터카 여행이라는 페이지는 인생이라는 책 속에서 가장 찬란한 금박으로 남을 것이다.

▲ 시간이 멈춘 듯 흐르는 자다르의 황홀한 일몰. 바다 오르간 계단에 앉아 바라본 자다르의 노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서서히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타임랩스로 담았다. ⓒ 김봉석

렌터카 핸들을 놓으며

3일 동안 시트로엥과 함께 누빈 길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화성 같던 파그 섬, 요정의 숲 플리트비체, 그리고 오늘 야생의 숨결을 느낀 파클레니차까지.

렌터카 여행은 우리에게 단순한 이동 수단 그 이상이었다. 스스로 경로를 정하고, 낯선 표지판에 긴장하며, 때로는 길을 잃어도 웃을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내일이면 핸들을 반납하고 다시 두 발로 걷는 여행자로 돌아가겠지만, 마음속에 품은 이 넓은 세상의 지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은퇴 후의 삶도 오늘 본 노을처럼, 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빛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임을 믿으며 자다르의 밤을 맞이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