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우리는 왜 지금 단종을 부르는가

서정적 위로 너머 시대적 질문
실패한 권력에 관대한 현실 법정
영화 속 패배를 지지하는 시민들
권력은 위에서 내려다보지만
존경은 아래서 끌어올려진다
깜깜한 객석에 불이 켜지자 훌쩍이며 눈물을 닦아내는 관객들이 보였다. 넷플릭스 같은 OTT가 안방을 장악한 시대, 굳이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할 영화는 많지 않다.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의 열풍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이번 주말이면 넘어설 ‘1000만 관객’이라는 고지는 단순한 흥행이 아니라 시대적 울림에 가깝다.
‘단종 열풍’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조와 계유정난, 단종의 역사를 다시 꺼내 읽는다. 그가 유배됐던 강원도 영월 청령포와 묻힌 장릉을 찾는 발길은 이어지고 있다. 스크린을 넘어 현실로 번진 단종의 이름. 2026년 우리는 왜 1457년 단종을 불러냈을까.
어쩌면 그 질문은 영화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인 사극, 그것도 여러 차례 다뤄진 이야기였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사극의 특성상 투자 유치는 험난했고, 자칫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언젠가 극장이 다시 이야기를 갈망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었다. 장항준 감독은 계유정난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사건 대신, 단종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뒤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평생 숨어서 산 실존 인물 엄흥도를 주목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밥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단종 이홍위는 다슬기국을 끓여온 막동어멈 등 민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밥상을 나눈다. “나로 인해 아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며 끝까지 그들을 지키려 고뇌한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그 말은, 스크린 위에서 사람의 온기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1000만 관객이 응답한 진짜 이유는 서정적인 위로 너머에 있다.
이 영화에는 지금 우리 현실을 관통하는 질문이 담겨 있다. 이홍위의 대사처럼 “설령 거사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다는 기록은 후대에 남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패배는 결코 나약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강한 자도 패배할 수 있다. 성공한 권력 장악은 언제부터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는가.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기억될 가치가 없는가. 영화관 문을 나선 질문은 자연스럽게 현실로 이어진다.
‘왕사남’이 흥행을 이어가던 시기, 우리 사회 역시 헌정 질서를 둘러싼 중대한 사안을 맞았다. 국가 최고 권력에 있었던 인물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고, 판결문에는 ‘실패’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헌정 질서를 위협한 시도가 좌절되었다는 점이 양형 판단의 한 요소로 언급되면서 사회는 묻기 시작했다. 실패는 단지 결과인가. 아니면 책임의 무게를 달리하는 요인인가.
이홍위에게 ‘실패’는 목숨을 걸고 남긴 정의의 기록이었다. 현실의 법정에서 ‘실패’는 양형을 판단하는 여러 사정 중 하나였다. 법의 판단과는 별개로 시민의 질문은 남는다. 리더십은 결과로만 평가되는가, 아니면 공동체를 향한 선택의 방향으로 평가되는가. 우리는 결과를 기억하는 것 같지만, 결국 방향을 기억한다.
역사책은 사건을 요약하지만, 공동체는 그 행간에 서린 사람의 표정을 기억한다. 단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곡을 했던 이들의 눈물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영월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은 500여 년 전 엄흥도가 지켰던 ‘사람의 도리’가 그곳을 기억의 공간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법정의 기록과 역사의 기억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약 1000만 관객이 극장을 찾은 것은 단순히 과거를 소환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품격을,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선택의 방향을 묻는다. 우리는 어떤 리더를 기억하는가. 권력을 끝까지 움켜쥔 자인가, 아니면 끝내 품격을 남긴 자인가. 성공한 권력은 흔하지만 존경받는 리더는 드물다. 단종 열풍은 과거를 추모하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리더십을 투영하는 집단적 상상력일지 모른다. 권력은 위에서 내려다보지만, 존경은 아래에서 끌어올려진다.
‘왕사남’은 결과를 알 수 없더라도 지켜야 할 것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살은 빗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를 향했는지는 역사에 남는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중동 엑소더스… 이란 교민 인접국 긴급 대피
- 코스피만 더 빠졌다… 시총 377조원 증발
- “다음 생에도 내 딸로”…6명 살리고 별이 된 10대 소녀 [아살세]
- 국회, 尹 사진 철거하고 李대통령으로…“우 의장 결정”
- 1만 팔로워 기독교 인스타, 알고 보니 JMS?
- ‘여수 4개월 영아 살해’ 부모 신상 ‘탈탈’…아기 죽던 날 아빠는 ‘이곳’에
- 李대통령 분당 아파트 매수희망자 등장…“계약은 아직”
- [단독] “총리실 움직여 경찰서장 목줄”… 이만희 ‘복심’ 이희자, 정치권 접촉 정황
- [단독] ‘이재명표 배드뱅크’ 빚 탕감 시작도 못 했는데… 이자만 챙겨
- [단독] 임대아파트 낙인에… 같은 동네인데 초등 입학생 수 ‘극과 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