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에 세워질 뻔한 이스라엘, 분쟁은 운명이 아니었다
[정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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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판 환단고기 5편 케냐에 세워질 뻔한 이스라엘: 분쟁은 운명이 아니었다. |
| ⓒ 정환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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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유대 인구 종교 성향 통계자료 (Israel in Figures 2015) 이스라엘 유대인 중 자신을 종교적이라 생각하는 인구는 20%에 그친다. |
| ⓒ 이스라엘 통계청 |
이처럼 시온주의 초기에 팔레스타인은 유대 국가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않았다. 게다가 단점도 명확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이주시키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한 데다가 이미 수많은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왜 하필 팔레스타인이었을까
오늘날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은 유럽의 민족주의에서부터 그 싹이 피어났다. 통념과는 달리 민족이라는 개념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다. 17-18세기 유럽에서 기독교 중심적 공동체 개념을 대체해 국가 단위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명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후적으로 만든 공동체 개념이 정치·사회적 현실에 들어맞을 리 없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상이한 특질을 지닌 집단들은 여럿 존재했다. 게다가 복수의 국가에 분포하고 문화적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소수 집단들은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민족 개념이 태동했을 때 유대인들은 다른 유럽인과의 동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중세 동안 축적된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경제사회적 반감 등의 영향으로 많은 유럽인이 유대인을 같은 민족으로 인지하지 않고 차별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유대인 모세 헤스는 이러한 현상을 관측하며 유대인들에게 다른 유럽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민족성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유럽 민족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유대인의 존재를 항상 이질적으로 여겨왔다. ... 계몽과 해방에도 불구하고, 민족성을 부인하고 (팔레스타인이 아닌)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은 거주지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절대로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Moses Hess, Rome and Jerusalem: a Study in Jewish Nationalism, trans. Meyer Waxman(New York: Bloch Publishing Company, 1918), 74.
따라서 헤스는 민족성과 관련이 깊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식민촌(colony)"을 건설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함으로써 민족을 부흥시켜야만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대 유대인들은 여전히 동화를 지향했고, 머지않아 반유대주의가 사라지리라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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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10월 13일(현지 시각)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휴전 합의에 따라 이스라엘 교도소에서 석방된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가자지구에 도착하자 환영을 받고 있다. |
| ⓒ 연합뉴스/AP |
앞서 헤스는 유대 민족이 부흥해야 반유대주의가 해결되고, 유대 국가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반면, 핀스커는 유대 국가를 세우는 것 자체가 반유대주의의 해결책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끝없는 이산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 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도록 안전하게 지낼 국가를 가지고자 한다면, ... 당면한 목표는 '성지'[팔레스타인]가 되어서는 안 되며 ... 외세 지배자가 추방할 수 없고 민족의 자산으로 남을 수 있는, 가여운 동포들을 위한 넓은 땅이 필요할 뿐이다.
Leo Pinsker, Auto-Emancipation (MASADA Youth Zionist Organization of America, 1935), 22.
이러한 관점에서 핀스커는 북아메리카를 제안했다. 그런데 그의 사상에 공감한 대다수 지지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고집했다. 이들은 박해받는 유대인을 구한다는 목표 못지 않게 '유대 민족의 부흥'을 꿈꿨다. 팔레스타인 이외에서 세워질 국가는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기 어렵고, 단순히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국가가 되기 쉬웠다.
핀스커는 이들의 소망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식민화(colonization)"를 목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10여 년간 부단히 노력해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유대인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정착지를 조성할 미개간지도 거의 없다는 암담한 사실만 확인했다. 이후 독일의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오스만 제국이나 열강과의 협상으로 팔레스타인을 얻을 수 있다는 정치적 해법을 제시해 희망을 다시 불어넣었다. 그러나 1902년에 협상은 실패로 끝이 났다.
단기간에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바로 그때 동유럽에서 제2차 포그롬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피란할 땅이 절실해지자 영국은 동아프리카 식민지(우간다로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케냐 서부)를 할양해 줄 의사를 보였다. 헤르츨은 이를 받아들였고, 1903년 제6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의제로 상정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당장 동아프리카에서 유대 국가나 대규모 정착지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을 내버려둔 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을 목표로 할 것인가? 격렬한 논쟁 끝에 다수의 시온주의자들은 후자를 택했고, 1905년 제7차 대회에서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지 않는 계획은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아랍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논쟁의 핵심에 오른 것은 아랍인들의 존재였다. 동아프리카안에 찬성한 소수파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토착민이 많아 유대 국가를 세우기 어렵다는 회의론을 내세웠다. 이는 그동안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금기시하던 주제였기 때문에 파장이 컸다.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을 구한다는 대의를 핵심으로 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국가를 건설하면 이곳의 토착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온주의에 반대한 여러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해 왔으나,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이 "버려진 땅"이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고 선전하며 회피했다. 그러나 이르게는 1891년부터 내부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해외에서 우리들은 이스라엘 땅[즉, 팔레스타인]이 사람들이 거의 전적으로 살지 않고 경작이 안 된 사막지대이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땅을 살 수 있다는 믿음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어디에서도 경작에 적합하지만 미경작지로 남아 있는 땅을 찾기는 힘들다. ...
해외에 사는 우리 유대인들은 모든 아랍인이 당나귀같이 그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야만적인 사막민으로 믿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다. ... 아랍인들, 특히 도시인은 이 땅에서 우리의 행동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Ahad Ha'am, "EMet M'Eretz Yisrael" (Truth from Eretz Yisrael), 1891, quoted in Alan Dowty, "Much Ado about Little: Ahad Ha'am's 'Truth from Eretz Yisrael,' Zionism, and the Arabs," Israel Studies 5, no. 2 (2000), 161-2.
상기 인용문은 시온주의자 아하드 하암이 언론에 쓴 '이스라엘 땅에서의 진실'이다. 하암은 아랍인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경작 중이고, 식민화에 저항할 것이라는 '진실'을 알렸다. 그러나 이를 아랍인에 대한 권리 침해라는 윤리적 문제로 연결하지 않고, 체계적인 식민 활동이 필요한 이유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아랍인을 폭행하는 행태는 저항을 부추긴다는 이유에서 비판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은) 아랍인을 적대하고 잔인하게 대하고, 그들의 영토를 부당하게 침범하고, 부끄럽게도 타당한 이유도 없이 폭행하고, 심지어 그런 행동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위험하고 야비한 충동을 멈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 아랍인들이 힘과 용기를 선보이는 자들만을 존중한다는 우리 민족의 생각은 옳다. 하지만 상대방이 압제적이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 (아랍인들은) 원한을 품고 복수한다.
Ahad Ha'am, "EMet M'Eretz Yisrael," quoted in Dowty, "Much Ado about Little," 175-6.
당시 하암의 지적은 공감받지 못했고, 사소한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암의 동료인 메나헴 우씨쉬킨은 아랍인과 유대인의 관계가 대체로 평화로우며, 그간의 충돌은 오히려 유대 민족의 성장을 보여주는 기쁜 변화라고 주장했다.
(유럽에서) 적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입 맞추고 잎새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떨던 우리 형제들이 마카비의 땅[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자 용감하게 적들을 때리기로 결단한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다. …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확고히 자리 잡고 충직한 시민으로 번영을 누리게 된다면 굉장한 힘을 가지게 되고, 아랍인 같은 집단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Ahad Ha'am, "EMet M'Eretz Yisrael," quoted in Dowty, "Much Ado about Little," 175.
이러한 인식은 1898년 제2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도 공개적으로 옹호되었다. 팔레스타인을 공식 답사하고 돌아온 레오 모츠킨은 약 65만 명의 아랍인들이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선동된 아랍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충돌이 있었다"라고 보고했다. 그는 누가 왜 선동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유대인들이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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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가 2025년 12월 7일 일요일 예루살렘에서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와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헤드폰을 조정하고 있다. |
| ⓒ 로이터=연합뉴스 |
그런데도 1903~5년에 동아프리카안을 두고 아랍인들의 존재가 논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그들의 저항이 방해물이 될 정도로 거셀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팔레스타인을 "민족 없는 땅"으로 선전하던 시온주의자 이스라엘 쟁윌도 1904년에는 이렇게 고백했다.
시온주의자가 직시하기를 원치 않지만, 결코 눈을 돌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주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곳을 점유 중인 부족들을 검으로 쫓아내거나 ... 많은 이질적인 인구와 함께 사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Israel Zangwill, The Voice of Jerusalem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21), 92.
결과적으로, 제7차 시온주의자 대회는 "아랍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법도 합의하지 않은 채 그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다는 목표만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지도부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공감대를 형성해 온 계획은 있었다.
최초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시온주의자 중 한 명인 엘리에젤 벤예후다가 1882년 9월에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전한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강해져서 조금씩 은밀히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 간첩처럼 은밀하게 행동하고 계속해서 (땅을) 사야 한다.
한 달 후의 편지에서도 같은 계획이 설명된다.
우리는 신뢰하는 ... 사람들을 제외하곤 정보를 노출하지 않도록 규칙을 정했다. 우리가 강해지고 다수가 되기 전까지 아랍인들의 적대감을 일깨우지 않고 전략적으로 행동한다면, 땅을 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6월 12일 자 헤르츨의 일기에는 토지 몰수 계획이 나온다.
(열강이) 우리에게 할당해 주는 지역에서 온화하게 사유지를 몰수해야만 한다.
1898년, 사회주의 시온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나흐만 시르킨 역시 <유대 문제와 사회주의 유대 국가>라는 글에서 팔레스타인의 토착민을 "온건하게 이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학자인 베니 모리스에 따르면, 1937년 무렵부터 시온주의 지도부는 강제적인 인구 "이전", 즉 아랍인의 추방에 사실상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여기에는 신이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약속했다는 종교적 당위성은 없었다. 대신, 아랍인이 토착민으로서 가지는 권리보다 유대인의 정치적 권리가 우선한다는 인종차별주의가 있었을 뿐이다.
국내에서 이-팔 분쟁은 종교와 민족이 달라서 발생한 불가피한 숙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껏 본 것처럼 이러한 서사는 환단고기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종교적 충돌은 사실상 없었다. 민족이 달라서 싸우게 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인만의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싸움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학계는 "아랍 유대인(Arab Jew)"이란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유대인들은 아랍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아랍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랍화된 유대인(musta'rab)"으로 불렸다. 즉, 아랍과 유대는 역사적으로 배타적인 정체성이 아니었다. 나아가 여러 학자들은 민족주의가 전파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아랍 지역의 유대인들이 아랍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며, 이들을 '아랍 유대인'으로 지칭한다.
이러한 역사적 공존 관계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을 부흥시키겠다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단절되었다. 만약 시온주의자들이 없었더라면, 아랍 지역의 유대인은 오늘날 아랍 기독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아랍 민족'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팔 분쟁이 운명이란 단어 따위로 미화될 수 없는, 정치적 기획의 희생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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