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없는 나라 '조선'의 국민으로 살다가 한국으로 귀화했어요"

류경애 2026. 3. 2. 16:1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대판 디아스포라] 재일조선인 3세 유키씨 "'진정한 조국'은 제 마음 속에 있어요"

[류경애 기자]

 유키 씨와 둘째 아이
ⓒ 김유희
지난여름, 네 살 아이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독일 어린이집 방학 동안 한국의 가족들을 만나고 어린이집도 다니며 한국어 집중교육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동네 어린이 도서관에서 유키 씨를 처음 만났다. 동갑내기인 우리 아이와 유키 씨의 둘째가 어울려 노는 사이에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이니치, 즉 재일조선인 3세였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도쿄에 5년 넘게 살았던 경험이 있는 나는 평소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게다가 마침 최근에 작고한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 교수의 여행기 <디아스포라 기행>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던 참이기도 해서 조심스레 유키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남한도 북한도 모두 고향이라는 느낌"

- 유희와 유키, 이름이 두 개다.
"부모님과 (한국인)남편 모두 나를 '유키'라고 불러요. 12년간 (조선인)학교에서는 '유희'였지만 사실 유키가 더 익숙해요. 일본 성도 있어서 야마우치 유키라고도 해요. (이민)1세대들이 일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져야 했던 통명(일본 가명)이지만 이것 역시도 제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20대 때는 한국 성인 '김'으로 취직해서 재일조선인으로서 당당히 일본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너무 나 자신만을 내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산다는 원칙이 변한 건 아니에요."

유키 씨의 친조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일자리를 찾아 경상도에서 오사카로 건너갔다. 농토를 잃은 많은 조선인들이 산업화가 한창인 일본으로 흘러 들어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던 시절이었다. 음악 공부를 하러 간 외조부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해방이 되었을 때는 기쁜 마음이었지만 양쪽 집안 모두 일본에서의 삶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있던 터라 마음처럼 간단히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곧 6·25가 터져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조국으로 돌아갈 일이 요원해졌지만 자식들 결혼만큼은 조선인들끼리 시키고 싶어 했던 그들의 바람으로 유키 씨의 부모님은 선을 봐서 결혼하고 생업을 위해 도쿄로 이주했다.

- 오랫동안 '조선적(籍)'을 유지하며 살았다.
"네, 맞아요. 우리 가족은 제가 결혼할 때까지 조선적으로 살았어요.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 조선의 국민으로요. 하지만 조선이란 나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저희도 사실은 국적이 없는 셈이죠. 평생을 일본에 살아도 참정권이 없고 부동산 매매나 개인 사업에도 크진 않지만 제약이 있고요. 나라가 없으니 여권도 만들 수가 없어요. 해외여행이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지만 절차가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요. 이렇게 많은 제약과 불편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걸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조선적으로 살고 있죠. 제 결혼만 아니었다면 저희 아버지도 그랬을 거예요."

해방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2백만 명이 넘었다. 소수의 유학생과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전쟁(2차세계대전) 말기에 탄광이나 군수 공장에 강제동원 된 노동자나 고향에서 살길이 막막해져 이주한 노동자들이었다. 해방 직후 약 140만 명이 귀국했지만 유키 씨의 조부모처럼 이미 가족이나 직장 등 삶의 기반이 잡혀 있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도 마땅한 생계 수단이 없어 일본에 남은 이들이 약 60만 명이었다. 이윽고 6·25로 그들의 나라 조선은 남북으로 나뉘었다. 남한이나 북한 또는 일본을 선택해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조선인' 상태로 남았다. 민족의 분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곧 통일이 될 조국의 국적을 갖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들 '조선인'에게 특별 영주권을 부여해 일본에 계속 살 수 있게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국인 신분으로는 선거는 물론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작은 회사의 취업조차도 어려웠다. 자연스레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꺼리는 파칭코나 고물상, 동물을 도축하고 유통하는 요식업인 야키니쿠 등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 조선학교에 다녔다.
"초중고 12년을 조선학교에 다녔어요. 학교 친구들은 모두 재일조선인이고 일본인 친구를 사귈 기회는 전혀 없었어요. 그런 환경이 답답해서 고등학교는 일본 학교로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실 것 같아 말을 꺼내지도 못했네요(웃음). 하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길 필요 없이 서로 공감하며 울고 웃을 수 있었던 조선학교 시절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회에 나와 보니 일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꼭꼭 숨기고 사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니까요. 그렇게 살면서 그들이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저는 운이 좋은 거죠."

조선학교의 역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아이들이 우리말과 글을 잊지 않도록 '국어강습소'를 마련했다. 그러나 일본 교육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쇄령이 내려져 운영에 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당시 전쟁 후 복구에 전념하느라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남한에 비해 북한 정부는 큰 관심과 함께 대대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조선학교 학생과 가족들은 북한 국적자가 아니라 유키 씨와 같은 조선적을 가졌거나 귀화해서 남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의 지원을 받는 조선학교에 다닐까. 일본의 일반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우리말과 역사, 문화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또한 유키 씨가 경험한 것과 같이, 차별이 존재하는 일본 사회에서 조선학교는 동포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고리이기도 하다. 남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재일한국학교'가 4군데인 데 반해 한때 160개교에 달했던 조선학교는 현재도 약 80개교로 압도적으로 그 수가 많다.
▲ 빛나는 우리 학교  재일조선학교는 일본으로부터는 핍박을, 한국으로부터는 소외를 받아왔다.
ⓒ 하나를 위한 교육
하지만 조선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치마저고리 교복'은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일본 내 우익 세력의 반한 감정이 높아질 때마다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를 칼로 긋는 '치마저고리 테러'가 빈번했다. 유키 씨가 고3 때는 그 정도가 심해 학교에서 아예 등하교용 교복을 따로 제작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 학생들이 단지 그 옷을 입었다고 공격을 받다니 분노가 치밀었죠. 초등학생 때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저한테 침을 뱉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지켜주고 존중해 주는 일본인들도 많다는 걸 알았기에, 복수심보다는 우리가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행동으로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죠."

이렇게 상처로 남은 일들은 동시에 유키 씨에게 지켜야 할 뿌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녀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한도 북한도 모두 고향이라는 느낌이 있어요. 언젠가 꼭 통일이 되어 하나가 될 나라죠. 그래서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우리 뿌리가 있는 나라니까 당연히 모두 나서서 성금을 보내고 지원을 했던 거죠."

그러나 그때 북한으로 보내진 그들의 마음은 의도대로 북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지도층에 의해 빼돌려졌단 사실이 알려져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때도 그렇고, 납치 사건이나 핵 미사일 문제 등으로 북한에 크게 실망한 사람들도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그러나 유키 씨는 북한 정부와 별개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크다.

"25년 전, 고3 때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남한처럼 열려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있던 '우리나라'라는 생각에 모두들 들떴죠. 그런데 기대와 달리 왜소하고 생기 없는 사람들을 보니 안타깝고 심지어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가해국인 일본에 사는 우리 교포들의 처지도 기구하지만 자기 나라에 살면서도 굶주린 북한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어요.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무력했죠. 그렇게 힘든 데도 우리를 환영해주고 미소 지어주던 얼굴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생생해요."

"결혼을 계기로 가족 모두 남한으로 귀화"

- 남한으로 귀화하게 된 계기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한국인)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귀화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조선적으로는 여권을 만들 수가 없으니 외국에 한번 나가려면 엄청나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거든요. 북한은 일본 정부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니까, 여권을 만들려면 일본이나 남한으로 귀화해야 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남한이라고 생각했죠. 일본으로 귀화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조선적을 포기한다니 1세들의 정신을 저버리는 것 같아 죄스러웠지만 엄마가 응원해 주셨어요. 그러다 결국 제 결혼을 계기로 가족 모두가 남한으로 귀화했죠."

유키 씨는 '신문장학생'으로 일본에 온 한국인 유학생과 당시 유행하던 믹시(한국의 싸이월드 같은 일본의 초기 SNS)를 통해 만나 연애와 결혼을 하고 일본에 살다가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에 조부모의 호적은 남아있었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부모의 호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키 씨가 그 조부모의 자손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먼저 조부모의 호적을 따라 귀화를 한 후 유키 씨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형식이 훨씬 간단했기 때문에 결혼을 계기로 유키 씨의 가족은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 한국의 첫인상은?
"아, 여기가 진짜 내 나라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문화 충격도 컸죠(웃음). 일본보다 훨씬 자유롭고 활기차 보였는데, 막상 살아보니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써야 하더라고요. 가족 간의 관계도 일본보다 훨씬 끈끈하면서 허물이 없다고 할까, 간섭이 심하다고 할까(웃음). 겨울이면 다 똑같은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다니는 것도 개성을 중시하는 일본이랑 다르다 싶었고요."

만 10세, 4세 아이를 키우는 유키 씨는 종종 한국 엄마들의 발빠름을 따라가지 못해 당황하기도 한다. 서툰 한국어 때문에 알림장의 내용을 놓치거나 준비물을 빠트리는 일도 잦았다. 학부모 단톡방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일본에서 와서 잘 모를 거라는 배려 섞인 시선이 서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아이들로 이어진 관계를 제외하면 한국인 친구도 아직 사귀지 못했다.

조부모의 조국,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지만 어쩐지 또다시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어요 처음엔. '저 일본사람 아니에요, 교포예요'라고 하면 '한국계 일본인 아니야?'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 차이를 설명하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우리의 아픔을 왜 몰라주나 싶어 붙잡고 가르치려고도 했지만 이제는 이해하게 됐어요. 안 배워서 모르는 거니까요. 요즘엔 그냥 편하게 '일본인이에요'하고 말하기도 해요. 하지만 한편으론 가해국인 일본에서 꿋꿋이 정체성을 지켜온 우리들에 대해 꼭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죠."

유키 씨는 의외로 신앙에서 길을 찾았다. 그저 남편을 따라갔던 교회에서 무심히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영감을 얻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포로 태어난 게 제 사명이라는 생각이요. 고3 수학여행 때 평양에서 만났던 그 아이들, 통일이 되면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준비시켰구나, 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성경공부도 하고 있죠."

'유끼마미'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한국에서의 육아 일상을 브이로그로 담고 있어요. 영상을 통해 제 이야기를 꺼내 놓다 보니 저와 같은 한일 부부나 재일교포 그리고 우리 역사를 궁금해하는 한국 분들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아요."

"아이들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 강요하고 싶지 않아"
 두 아이들, 우리 아이와 유키 씨의 둘째
ⓒ 아이귤
아이들의 정체성에 관해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 조부모님과 부모님 외에도 많은 분들이 일본 사회의 차별 속에서 어떻게 우리를 지켜왔는지는 꼭 전해주고 싶어요.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요. 제가 조선학교에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공감하며 힘을 얻었듯, 우리 아이들도 자신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디아스포라 기행>의 서문에 저자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경계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편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차별과 배제의 시선을 견디며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긍정하는 유키 씨야말로 마음속에 이미 국민국가의 개념과 물리적 국경을 넘어선 '진정한 조국'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책만 읽었을 때는 막연했던 생각이 유키 씨와의 대화를 통해 한층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절반은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독일에서 자라날 내 아이 역시 유키 씨처럼 그 내면에 든든하고 굳건한 자신만의 '진정한 조국'을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