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들러보세요, 한국을 사랑한 외국 기자가 남긴 '궁전'

이영천 2026. 3. 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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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④] 창의문~인왕산~돈의문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서울 창의문 고개에서 보이는 서촌이 차분하다. 분수령인 자하문 너머 종로구 부암동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비롯한 오랜 통치 공간이어선가. 자연스러운 차분함보다는 오랜 위력에 눌린 절제에 가까워 보인다. 어느 통치자가 이 공간의 건축 높이를 극도로 제한해 놓았다. 그 영향일까? 소리 높여 외치기보다 침묵하기로 다짐한 공간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 서촌에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하며 호가호위를 누린 자들이 있었다. 윤덕영과 이완용의 아방궁은 사라졌어도, 그 땅에 쌓인 분노까지 씻겨나갔을까. 아방궁이 남겼다는 작은 돌덩이만으로도, 하늘을 찌르는 분노를 능히 증명할 수 있겠다.

그 집들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얼마나 호화로웠는지는 기록에서만 엿볼 수 있다. 나이 든 서촌 골목은, 그런 사실을 애써 상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골목을 지날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침묵을 느낄 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리를 차지한 동네, 그것이 오래된 서촌의 인상이다.

시인을 기억하는 공간
▲ 윤동주 문학관 창의문에서 길 건너 인왕산 오르는 초입에 '윤동주 문학관'이 서 있다. 옛 수도시설을 고쳐 문학관으로 활용 중이다.
ⓒ 이영천
윤동주 문학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누상동에서 잠깐 시인이 하숙한 게 전부다. 서촌이라는 공간에서 상반된 삶을 살다간 이들이 어디 이들 뿐이랴. 문학관은 애당초 시인을 위해 지은 공간이 아니었다. 옛 수도 시설을 고쳤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만, 막상 안에 들어서면 설명이 아닌 감각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 공간은 이미 충분히 절제되어 있다.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던 구조가 시어를 담아 보내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시인의 노래가 여기서 낮게 흐르는 이유다. 물이 넘치지 않도록 설계된 공간에, 생각 역시 쉽사리 넘지 않는 건 그런 까닭일까.
▲ 장안연우_겸재 정선 겸재 정선이, 인왕산 초입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보고 그렸다는 그림. 현장에서 대비해 보면 실경 산수화의 진수를 누릴 수 있다.
ⓒ 이영천(공원 전시물 촬영)
뒷동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영혼처럼 시인의 시가 배어있다.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남산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던가. 풍광이 고졸하다. 인왕에서 절제는, 이처럼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경지에 다다른 여유다.

무상한 사랑과 권력

공원을 지나 능선에 오르다 보면, 도시 표정이 빠르게 유순해진다. 소음과 건물, 단조로운 콘크리트가 작아지고 흙과 돌, 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높이를 다투는 건물들이 얌전해 보이고, 곁의 백악과 멀리 남산까지 순응하는 모양새다.

성곽보다, 인왕은 성가퀴(성 벽위에 낮게 쌓은 담) 따라 오르는 길이다. 왕조시대 성가퀴에 1970년대와 2000년대 성가퀴가 족보처럼 열을 지었다. 이를 따라 인왕을 오르다 보면, 이 산이 도성의 경계이자 방어선이었음을 실감한다. 살아남은 성곽이 이를 설명하려 하나, 산은 자신이 어떤 역할이었는지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는 듯하다.
▲ 부부 소나무 인왕산 오르는 중턱, 뿌리가 이어진 소나무 두 그루가 계단 옆에 서 있다.
ⓒ 이영천
부부 소나무란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를 잇고 있는 연리지가 따사롭다. 연리지를 지나 치받는 경사를 오르니, 멀리 치마바위가 넓적하다. 다정한 연리지를 시기했을까, 폐위된 단경왕후가 중종을 위해 치마를 걸어두었다는 널찍한 치마바위가 무표정해 보인다. 권력과 사랑은 정반대였을까. 바위에 그 무상함이 더 또렷해진다. 그러함에도 바위는,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던 중종의 처지를 증명하지도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래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고, 물적 토대가 탄탄해진 숙종 시대다. 양란의 황망함을 더는 겪지 않기 위해, 인왕산 성벽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간 외겹의 긴 성곽을 쌓았다. 기차바위를 지나, 세검정 홍지문을 지나, 멀리 향로봉을 향한 성곽이다.
▲ 기차바위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가지를 쳐 기차바위, 홍지문, 구기동을 지나 멀리 보이는 북한산 향로봉으로 이어진 '탕춘대성'의 능선이다.
ⓒ 이영천
탕춘대성이 여기서 가지를 질러 나가, 북한산성에 잇닿는 도성 북쪽 분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록 한 번도 그 기능에 충실하진 못했어도, 그 또한 분명 도성의 한 부분이다. 곳곳에 흔적으로 남은, 하찮게 여길 존재가 아니다.

풍경이 아닌 기운을 붙잡은 그림

삿갓 바위란다. 인왕산 정상에 서면 도성이 한 폭 그림처럼 들어찬다. 멀리까지 펼쳐진 길과 건물, 그 위를 덮고 있는 공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 한양도성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한양도성. 좌측이 백악, 우측이 남산이다. 멀리 낙산 자락이 희미하게 보인다.
ⓒ 이영천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리며 붙잡으려 했던 순간도 아마 이런 풍경 아니었을까. 친구의 쾌유를, 비 내린 후 개는 인왕에서 보고자 한 뜻을 조금은 알아차리겠다. 겸재는 산의 윤곽을 정확히 재현하기보다, 산을 둘러싼 기운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비를 쏟고 개이며 바뀌는 하늘의 표정, 그에 따라 달라지는 산의 얼굴을 순간 보고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웠다. 우정이란 그런 것이다. 나눠도 나눠도 닳지 않은 그 무엇. 그림 속 인왕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잠시 포착된 상태에 가깝다.
▲ 인왕제색도_겸재 정선 비 개인 후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 병환 중인 친구 이병연의 쾌유를 빌면서 그렸다.
ⓒ 국가유산청
인왕은 호랑이다. 좌청룡 우백호 중 우백호이니, 하얀 털에 검은 줄무늬의 호랑이다. 그러니 인왕 범바위는 산의 축소판이다. 권력의 상징도 무서운 호랑이였을까. 범바위 앞에 서니, 그 감각이 분명하게 다가든다.
권력은 산을 배경으로 자신을 영원처럼 세우려 했다. 왕정도, 공화정도 산을 빌려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산은 그걸 기억하지 않는다. 바위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사람만이 이름을 남기려 애썼다. 그 차이에서, 산천은 의구하게 인생은 덧없이 느껴진다. 인왕을 오르면서도 이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저 선인들이 남긴 발자국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 인왕산 남측 가까이 우측 중간에 보이는 곳이 범바위와 군부대. 좌측 중간은 사직공원을 지나 경희궁과 기상청이 있는 숲이다. 그 앞에 남산이 보이고, 멀리 오른쪽으로 관악산이 아련하다.
ⓒ 이영천
내리막에 사직공원이 가까워지면, 굵은 바위산 인왕의 인상이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든다. 이곳엔 제사의 기억이 있고, 항일의 기억이 있으며, 지금은 산책과 휴식이 물처럼 흐른다. 서로 다른 시간이 한 장소에 겹쳐 있지만, 그 겹침이 부산스럽지 않다.

도성은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시간을 쌓는 데 익숙해져 있다. 지우지 않고, 앞세우지도 않은 채, 그냥 함께 품었다. 겸재의 그림이 풍경을 넘어 기운을 붙잡았듯, 사직공원 역시 시간의 깊이를 그대로 안고 있다.

문은 사라지고

이회영 기념관에서 경희궁 터와 옛 기상청 자리를 지나 돈의문으로 향하는 지도 위의 길은 짧다. 그러나 실제로 걸어보면, 거리는 생각의 길이만큼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회영의 선택은 기념관 안에 정리된 이야기로 남았지만, 그 선택이 갈구했던 시간과 열망은 전시되지 못했다. '존경할만한'이라는 수식어의 무게보다도, 고난의 생을 선택한 그 삶의 여정을 더 무겁게 바라보고 싶어진다.
▲ 이회영 기념관 귀족의 참다운 사회적, 국가적 역할을 보여준, 이회영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찾았던 날, 휴관이어서 문이 닫혀 있다.
ⓒ 이영천
경희궁은 허물어졌고, 기상은 수치로 기록되었으며, 한 집안의 결단은 기념관 하나에 남았다. 서로 다른 성격의 흔적들이 이웃한 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제1의 학교가 궁궐을 차지했고, 그 한 귀퉁이에 날씨를 예측하던 기관이 있다.
사회관계 밀도가 촘촘해질수록 날씨는 삶은 물론 경제의 주요 요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곽 옆에서 여전히 내일 날씨를 예측한다. 땅에 새겨진 무늬는 이토록 질기고 지워내기 힘들다는 걸 새삼 한다.
▲ 딜쿠샤 AP통신사의 '앨버트 테일러'가 그의 아내에게 지어 준 집. 딜쿠샤는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이영천
AP통신사의 앨버트 테일러는 분명 용기 있는 언론인이다. 아니, 우리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렸으니 말이다. 일제가 그를 가만두었을 리 만무하다.
'딜쿠샤'라는 집을 그는 아내를 위해 지었단다. 사랑의 극치가 어디에 가 닿았을까.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집이 또 있을까. 사랑이 뭔지 궁금하다면 이 집을 꼭 둘러보기를 권해드린다.
▲ 홍난파 생가 뛰어난 예술가로, 질곡의 친일파로 한 생을 살다간 음악가 홍난파의 생가. 집 뒤로 인왕산 범바위가 보인다.
ⓒ 이영천
질곡의 우리 역사가 한 몸에 새겨진 음악가가 있다. '봉선화'나 '고향의 봄'은 마치 꿈결에 들려오던 노래처럼 여겨진다. 홍난파라는 음악가가 지은 노래다. 이 노래들을 우리가 과연 저버릴 수 있을까. 그는 나중 친일에 접어든다. 그가 살았다는 집이 정갈하게 남아 있다. 치욕과 배반의 역사도 우리 역사이듯 그의 생 또한 그러하다. 그의 노래를 우리가 버리지 못하듯 그의 행적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곽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고, 흔적을 더듬으며 돈의문 터에 이른다. 문은 없다. 다만 번잡한 길만 남았다. 문이 사라진 자리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무엇을 막았고, 무엇을 내보냈는지 기억에만 남아 있다.

왕조 개창 초기, 여러 번 문을 짓다 보니 '새 문'이 되었다. 사람들은 새 문이 있던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났다. 문이 요구한 건 찰나이지 영속이 아니다. 속도를 늦추는 일, 뭐든 서둘러 지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미음 완보로 걷다 보면, 이 도시는 설명보다 훨씬 많은 걸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시나브로 느끼게 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너무 빨리 지나쳐 왔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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