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도 낯선 이름 '김단야'... 독립운동가 평가 기준을 묻습니다
[서부원 기자]
여기 A와 B, 두 독립운동가가 있다. 1902년에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A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 열여섯의 나이로 고향의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도중 체포되어 공주 감옥을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압송된 뒤 옥중 투쟁을 벌이다 1920년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1900년 경북 김천 출생인 B는 배재학당에 유학한 뒤 3.1 운동이 터지자, 고향에 내려와 여러 차례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모스크바를 오가며 공산주의자로 거듭났다. 그는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 학부장으로도 일했다.
B는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며, 3.1 운동 이후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6.10 만세운동의 실질적 배후였다. 일제의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소련으로 망명했다. 레닌 사망 후 집권한 스탈린의 이른바 '피의 대숙청' 당시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때였다.
우리 국민 중에 A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반면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공부한 이가 아니라면 B를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이 수천수만 명일진대, 어쩌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A의 존재가 더 특이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답을 공개한다. A는 유관순 열사고, B는 김단야 선생이다. 두 인물의 공통점이라면, 3.1 운동 당시 10대 후반의 나이로 고향에 내려와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는 것과 함께 둘 다 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이다. 당시 개신교는 근대 교육을 통해 자주적 독립 정신을 일깨우는 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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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 지은 개령교회와 옛 개령교회 터의 입구에 그대로 남은 대문 기둥. 김단야는 어린 시절 선친이 세운 이 교회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
| ⓒ 서부원 |
'왜 김천 지역 주민들조차 김단야라는 이름을 낯설어할까.'
김단야 선생의 고향인 경북 김천시 개령면을 답사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다. 그의 선친이 세운 교회가 마을 한가운데에 어엿한데,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교회에서 만난 신자분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이름은 고향에서 지워진 상태다.
몇 해 전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 병천면을 역사 동아리 아이들과 답사한 적이 있다. 열사의 생가터가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김에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여서 겸사겸사 들른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구동성 내질렀던 '감탄사'가 떠올랐다.
"선생님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걸 알겠네요. 조만간 '유관순 시'나 '유관순 면'으로 지명이 바뀔 것 같아요."
마을 입구부터 유관순 열사의 유적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었다. 생가가 복원되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기념관과 초혼 묘 등을 한데 묶어 성역화했다. 아이들은 열사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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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단야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69번지. |
| ⓒ 서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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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단야의 생가 마을은 경북 김천 개령면 입구에 조성된 '감문국 이야기 나라' 테마공원 모습. 저 멀리 김단야의 선친인 김종원이 세운 개령 교회가 보인다. |
| ⓒ 서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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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령초등학교 교문 옆에 늘어선 지방관들의 공덕비들. 개령 지역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유물이다. |
| ⓒ 서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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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단야가 다녔던 개령공립보통학교에는 지금 개령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입구에 선 '화랑의 상'이 이채롭다. 동상의 기단 옆에는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 서부원 |
그의 공적은 3.1 운동 이후에 더 빛을 발한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그가 주춧돌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주도한 6.10 만세운동은 국내외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이어져 전국에 지부를 둔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가 대구 계성학교 재학 시절부터 이끌어 온 동맹휴학은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신간회는 전국의 모든 학교로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말 독립운동 방식을 두고 갈등을 벌이며 혼선을 거듭하던 임시정부의 몫을 그를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벌충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그의 존재감이 흐릿한 건, 공산주의자라는 '멍에' 때문이다. 교과서에서조차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두 축이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여전히 '색안경'을 벗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가 창당한 조선공산당과 지금 북한 노동당을 같은 정당으로 여기는 황당한 인식은 고래 심줄보다 질기다.
그나마 그는 해방 전에 죽어서 건국훈장 수훈 대상자가 됐다. '빨갱이'라는 낙인 탓에 해방 후 60년이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받게 됐다. 훈격은 독립장으로, 세 번째 등급이다. 수훈한 지 20년도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지역 주민들이 그의 이름을 낯설어한다는 건 역사교육의 부재와 지방정부의 무관심 탓이 커 보인다.
총살된 후 김단야 선생의 유해는 소련 당국에 의해 버려졌다. 변방의 식민지 조선의 젊은 혁명가의 불꽃 같은 삶도 그렇게 지워졌다. 이름조차 잊힌 독립운동가가 어디 그뿐이랴마는, 그의 자취가 아예 사라지고 없는 고향 마을을 뒤돌아 나오려니 착잡함이 밀려왔다. 듣자니까, 작년부터 마을 어귀에서 지역 시민단체 주관으로 조촐한 추모 행사를 연다고 하니 나중에 오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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