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국립강화고려박물관이 필요한 이유
[전갑남 기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찾아온 후삼국의 혼란을 잠재운 것은 태조 왕건의 포용과 전략이었다. 918년 건국부터 1392년 조선 개국까지 고려는 475년 동안 한반도 주인으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궁예의 폭정을 뒤로하고 개경에서 닻을 올린 고려는 발해 유민까지 껴안으며 실질적인 민족 통합을 이뤄낸 진취적인 국가였다. 오늘날 전 세계가 부르는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은 바로 이 개방적이었던 고려가 보여준 국제적 위상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눈부신 위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려의 역사를 오롯이 마주할 독자적인 국립고려박물관 하나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 천하 제일의 고려청자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을 탄생시킨 시대에 대한 대접으로는 너무나 허술한 현실이다.
1. 찬란했던 '코리아'의 기원, 이제는 위상을 찾아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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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 고려 문화의 중심에 강화도가 있다. 읍면사무서 민원실에 게시된 홍보물은 강화가 피난처를 넘어 고려의 정신을 계승한 도읍지였음을 증언하며, 국립박물관 건립의 당위성을 전하고 있다. |
| ⓒ 전갑남 |
2. 강도의 비장미(悲壯美), 강화가 '고려의 심장'인 이유
강화도에 남겨진 고려 왕릉 4기(홍릉, 석릉, 가릉, 곤릉)를 마주하면 형언할 수 없는 역사의 쓸쓸함이 밀려온다. 이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국가적 관리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조선왕릉이나 경주·부여의 웅장한 왕릉에 비해, 강화의 고려 왕릉들은 소박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초라함'은 결코 고려라는 국가의 품격이 낮아서가 아니다. 1232년, 세계 최강대국 몽골의 기마병에 맞서 바다를 건너 수도를 옮긴 '강도(江都) 시대' 39년(1232~1270)은 국토가 유린당하는 참혹한 전란 속에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치열하고 비장한 항전의 기록이 있었다. 전시(戰時)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조성된 이 왕릉들은 화려한 장식 대신 국가를 지키겠다는 고려인의 절박한 의지를 품고 있다.
강화도는 거친 해협과 예측하기 어려운 조수(밀물·썰물)를 활용한 천혜의 방어 거점이었다. 몽골 기병이 넘지 못한 이 자연 요새 안에 왕실과 관청, 군사 시설이 집중 배치되었으며, 강화도는 단순한 대피소를 넘어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중심지로서 그 기능을 완벽히 수행해냈다. 개경의 본궁(本宮)을 재현하여 30여 년간 고려 정신의 지휘부 역할을 했던 강화 고려궁지가 그 증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고려궁지 모습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려의 심장이었던 그 터에는 고려 건축물이 아닌, 후대 조선 시대 관아 건물과 외규장각만이 자리 잡고 있어 '고려 도읍지'로서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인이 바뀐 집처럼 묘한 이질감을 주는 현재의 고려궁지는, 흩어진 고려의 파편들을 제대로 모으고 복원할 '독립된 박물관'의 존재가 왜 시급한지를 웅변하고 있다.
전란 포화 속에서도 수천만 개의 글자를 새겨 내려간 선원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인의 거룩한 신앙이자 정신적 방벽이었으며, 섬을 겹겹이 두른 중성과 외성은 자주 국방의 결정체였다. 비록 화려한 석물은 없을지언정 국난의 시기 국가 명맥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고려인의 눈물겨운 사투를 간직한 이 조각들을 이제는 한데 모아야 한다. 우리 역사의 진정한 강인함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3. 디지털로 잇는 고려의 꿈, 남북 평화의 새 이정표
강화에 세워질 박물관은 이제 물리적 한계를 넘어 VR·AR 등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개경이 북한 땅에 있어 직접 가볼 수 없는 지금, 디지털 기술로 개경의 화려한 왕궁과 유산들을 강화에서 생생하게 재현해낸다면 이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또한, 눈앞에 개경을 마주 보고 있는 접경지 강화의 특수성은 향후 남북 역사 공동 연구와 문화 교류가 재개될 때 그 성과를 담아낼 최적의 그릇이 될 것이다. 끊어진 역사 허리를 잇는 평화의 거점이자, 분단된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하나의 뿌리를 확인하는 미래형 전당으로서 가치가 여기에 있다.
이는 정부가 드디어 고려 역사의 독자적인 가치와 강화도의 상징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박물관 건립의 첫발을 뗐다는 중대한 신호다. 예산 확보라는 첫 단추를 꿰었으니, 이제는 내실 있는 추진이 관건이다. 475년 고려 왕조의 위대한 유산이 당당한 제 이름을 가진 독립된 공간에서 빛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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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관 건립은 우리 모두의 염원', 강화도 곳곳에 내걸린 경축 현수막이 국립박물관 유치를 향한 지역사회의 뜨거운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
| ⓒ 전갑남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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