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물오른 버드나무... 말차를 꺼낼 시간입니다

노시은 2026. 2. 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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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마상청앵'과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그리고 정선의 '서정보월도'에서 느껴지는 봄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2월의 마지막 주, 아직 바람의 온도는 우리네 마음처럼 변덕스럽기 그지없지만 오가다 마주친 버드나무 가지에는 초록 물이 올랐습니다. 나무의 몸통을 타고 올라온 생명력이 가지 끝까지 차오른 그 찰나의 생동감을 마주하니 걸음을 멈추지 않을 도리가 없더군요.

봄과 버드나무
 버드나무 줄기는 봄을 맞이해 터질 준비라도 하듯 연둣빛 물이 한껏 올랐다
ⓒ 노시은
조선의 화가 김홍도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의 <마상청앵(馬上聽鶯)> 속 선비도 봄의 끄트머리에 멈춰섰죠. 나귀 위에 앉아 넋을 잃고 위를 올려다보는 선비의 시선 끝에는 꾀꼬리 두 마리가 있습니다.
 김홍도 필 마상청앵도 (金弘道 筆 馬上聽鶯圖),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 공공누리
선비의 갓끈 너머로 일렁이는, 보일 듯 말 듯 묘사된 그 가녀린 버드나무의 흔들림 사이로 정다운 꾀꼬리 커플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아마도 선비는 잠시 멈춰 안개 낀 강가의 연둣빛 봄을 통째로 들이켜고 있던 게 아닐런지. 이 일렁이는 초록 선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좀 더 단단하고 정갈한 곡선으로 박제되었습니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의 알려진 모습은 버드나무가 있는 쪽이었고, 모든 이미지는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한콜렉숀 전시에는 국보급 청자가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 노시은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2019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의 DDP 전시 대한콜렉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귀여운 원앙의 모습이었다
ⓒ 노시은촬영
많은 분청사기나 청자에 전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靑磁 象嵌蓮池鴛鴦文 淨甁)>의 버드나무예요. 고려의 장인이 비색 바탕 위에 상감 기법으로 정교하게 굽이쳐 흐르도록 심은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연꽃이 퐁당퐁당 피어 있고, 그 사이를 한 쌍의 원앙이 한가로이 노닙니다.

정병(淨甁)이란 본래 부처 앞에 올리는 맑은 물을 담는 그릇입니다. 삶의 번뇌를 씻어내는 정수가 담긴 그릇 위에 버드나무와 원앙이라니. 아마도 고려인들은 가장 지극한 평화의 풍경을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맑은 물가'에서 찾았던 모양입니다.

도자기 위의 버드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보는 이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하늘거릴 뿐이죠. 그 평화로운 초록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의 변덕은 잦아들고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농밀한 초록을 품은 말차

이 기묘한 초록의 연결고리를 완성하기 위해 찻장을 열었습니다. 맑게 우러나는 잎차 대신, 가장 농밀한 초록을 품은 말차를 꺼냈습니다. 데워진 찻사발에 고운 초록 가루를 담고 따뜻한 물을 붓습니다.
 말차를 준비할 때 격불은 몹시 중요한 과정이지만 솔직히 나는 크게 소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노시은
다선이 찻사발 벽을 긁으며 내는 사락사락 소리는 선비가 탔던 나귀가 밟던 흙길 소리 같기도 하고, 정병 속 원앙이 가르는 물결 소리 같기도 합니다. 손목의 속도를 높여 격불을 하면, 찻잔 안에는 순식간에 미세하고 하얀 거품이 차오릅니다. 이 초록빛 거품은 버들강아지의 보송보송한 솜털을 닮았습니다. 아니면 고려인들이 빚어낸 비취빛 청자일까요?
 달콤한 마카롱 한 개를 먹고 나서 쌉쌀한 녹차를 마시면 기분 좋은 달콤함이 입안에 남는다.
ⓒ 노시은
찻사발을 들고 후루룩 말차를 마시기 전, 쨍한 달콤함으로 무장한 마카롱부터 오물오물거립니다. 달콤함으로 놀란 미뢰를 쌉쌀하고 따뜻한 녹색 정수 한 모금으로 정리해주면, 말차 특유의 쌉쌀함이 혀끝을 자극하다가 이내 개운한 단맛으로 변해 목을 타고 넘어갑니다. 잔에 남은 부드러운 녹색 거품마저 따뜻한 물로 행궈 마시고 나니 벌써 하루가 저물어 가네요.
 정선 필 서정보월도(鄭敾筆西庭步月圖), 정선(鄭敾, 1676-175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공공누리
이제 정선의 <서정보월도(西庭步月圖)>을 펼쳐봅니다. '봄날에 달빛을 밟으며 거닌다'는 이 그림에는 역설적이게도 '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맥의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미묘한 빛의 번짐이나 연둣빛으로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솔잎들의 꼿꼿함 같은, 그 달이 비추고 있는 윤곽을 통해 엄청 달밝은 봄날의 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선 소쩍새가 어디선가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김홍도의 그림에서 아침에 말 타고 외출했던 선비가 집으로 돌아와 정선의 그림 속에서 시동과 밤산책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혼자 슬며시 웃었습니다. 변덕스러운 바람과 함께하는 봄날이, 보이지 않는 달빛 아래 비로소 고요하게 닻을 내립니다. 보송한 연둣빛으로 터진 버드나무잎 사이로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일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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