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체로 살면서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 이유

박홍순 2026. 2. 2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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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만나는 인문학] 무엇이 인간 본성인가 ② 선한 인간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인문학을 친근한 미술작품을 통해 새롭게 조명합니다. 작품 속에 숨겨진 시대정신과 작가의 문제의식을 살피고 이를 동서양 고전으로 심화해 독자의 예술적 감수성을 높이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기자말>

[박홍순 기자]

 앙리 루소 <꿈> 1910년
ⓒ 퍼블릭 도메인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1844~1910)의 생애 마지막 그림 <꿈>은 인간 본성이 악하다고 여기는 견해와는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밀림에서 한 여인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다.

숲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고 나무에는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달려있다. 그녀 주위에 다양한 동물이 있다. 나무 위에는 새가 있고 그 아래로 코끼리 머리가 보인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면 위험한 맹수도 있다. 사자 두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그 옆으로 큰 뱀이 한 마리 지나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혀 불안과 위험의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바로 앞에 맹수들이 있음에도 평화롭다. 우연한 느낌이 아니다. 다분히 화가가 의도한 분위기로 보인다. 두 마리의 사자 뒤편으로 한 여인이 화려한 색의 치마를 입고 피리를 불고 있다.

자연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사람·동물·나무가 음악과 함께 한데 어우러진 축제의 장으로 느끼도록 그려져 있다. 자연적인 요소로만 채워진 밀림이라는 배경을 고려할 때 탐욕으로 가득한 이기심 등 문명의 흔적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읽힌다.

자연 상태에서 선한 인간을 그리다

앙리 루소는 <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문명화된 생활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자주 그렸다. 그가 평소에 "자연 외에는 스승이 없다"라고 주장한 점도 이와 연관이 깊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성을 향한 관심은 원시적 자연 묘사만이 아니라 인위적 기교가 생략된, 어린이의 그림처럼 평면적이고 소박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전문적인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점도 작용했지만, 그의 지향에도 맞물려 있다.

기존 회화의 틀을 넘어서는 소박한 그림을 지향하여 "어린이 모두가 예술가"라고 여겼던 피카소가 규칙에서 벗어나 아이처럼 그리는 루소에게 끌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자기 화실에 여러 화가를 모아 '루소의 밤'이라는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벽에는 "루소에게 영광을!"이라는 글을 걸어 두었다. 이성적인 원근법과 구도, 합리적인 화면구성으로 달려온 서양미술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고갱은 그의 그림을 보고 "진실이 있어. 미래가 있다고! 바로 여기에 회화의 진수가 있어!"라고 감탄했다.

이로 인해 현대 소박파 미술, 원시적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대체로 원시 상태의 평화와 풍요를 강조한다. 인간과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떠한 해를 입히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는 현대인과 선을 긋는다는 점, 원시 상태가 인위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인류의 뿌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인간이 본래 지닌 선한 본성을 드러내려는 화가의 열망이 녹아있다.

앙리 루소의 문제의식은 당시의 사상적인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는 '선한 원시인'이라는 문학적·철학적인 경향이 뚜렷하게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은 산업혁명에 따라 산업화·대도시화가 맹렬하게 진행되고, 극심한 빈부격차에 더해 범죄를 비롯하여 온갖 사회적 악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중이었다.

이에 반발하며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선한 원시인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생겼다. 원시와 문명의 대비를 통해 본래 선한 인간이 어떻게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로 변하는지를 드러내려 했다.

루소, 본래 만물은 선했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랭제뉘>라는 소설에서 선한 원시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랭제뉘'는 프랑스어로 '순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 화가 브루넬레스키(1879~1949)의 <랭제뉘>는 이 원시 부족 청년이 옷을 걸치지 않은 채 강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성과 문명을 접하지 못했던 원시 부족 청년을 통해 순수한 감정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나중에 이 그림에 나오는 생티브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그녀는 보호자 어른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랭제뉘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데에 "누구의 동의도 필요 없으며, 자기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자연적 감정에 충실할 때 진정한 약속과 덕성이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문명의 근간인 이성적 합리성과 각종 제도가 인간과 사회를 왜곡한다.
 움베르토 브루넬레스키 <랭제뉘> 1948년
ⓒ 퍼블릭 도메인
랭제뉘를 만나 대화를 나눈 늙은 신학자는 그동안 자신이 자연적 육체와 감정에서 유리되고, 합리적·과학적 이성에 의지하여 탐구하느라 인생을 탕진했다고 토로한다. 오히려 원시 부족 청년의 도움을 얻어 깨우침에 도달한다. "덕성을 초래할 수도 있는 고귀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정으로서 사랑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자연적인 감정에서 출발하는 사랑과 욕망이 혼란이나 괴물이 아니라 선한 덕을 실현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우리에게 근대 사회계약론으로 잘 알려져 있고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사상가 장자크 루소는 조금 더 논리적으로 본래 갖고 태어나는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옹호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 본성 관련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친다.

"인간은 선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본래 악하다거나, 미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악에 젖어 있다거나 하는 등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자연적인 인간이 선에 대한 관념이 없고 악하지도 않다는 말을 본성에는 아무런 경향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문명이 이성으로 구분한 논리적인 선악 개념의 잣대로 인간 본성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을 통한 강제가 필요하다는 기존 통념적인 발상을 반대하는 논리다.

실질적으로는 문명이 혼란을 초래하고, 오히려 자연적인 인간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평화로웠다고 한다. "미개인은 안식과 자유만을 추구하고 한가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자연적인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다. 개인의 자유, 타인과의 평온한 공존이라는 점에서 굳이 문명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선한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장자크 루소는 <에밀>의 첫 문장에서 "신이 만물을 창조할 때는 모든 것이 선하지만 인간의 손에 건네지면 모두가 타락한다"라고 했다. 문명인의 언어로 규정하자면 원래 인간은 선하게 만들어졌다. 뒷부분의 '인간의 손'이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아닌 문명에 길든 인간을 의미한다. 문명이 자연 상태의 조화와 질서를 왜곡하고 경쟁과 혼란을 퍼뜨렸다.

인류학이 밝혀낸 선한 원주민들

현대 문화인류학에서 상당수 연구자도 인간의 뿌리에 가장 가까운 원시 부족을 연구하여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20세기 인류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설명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이 그러하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문명사회에서 자연적 감정에 대해 강한 적의를 나타냈지만, 실제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상대방에의 호의를 통해 자신의 즐거움을 누린다. 유럽인들은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을 보며 수치라고는 모른다고 비난하지만, 수치의 기준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원주민들에게 수치는 육체의 노출이 크냐 작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평정한가 아니면 흥분된 상태에 있는가에 따른 것이다."

서로 갈등하고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행위를 수치로 여긴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배려를 우선한다. 심지어 동물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가축들이 식사에도 참여하며, 사람과 똑같은 관심이나 애정을 누린다."

다른 지역을 조사한 학자들의 문제의식도 대체로 비슷하다. 억압과 지배가 없는 수평적·평화적 공동체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로 알려진 '이누이트'의 생활을 보면 계층 분화가 별로 없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도 없다. 작은 물고기는 개인 소유지만, 사냥으로 획득한 식량은 분배한다.

현대인의 분배 기준은 능력과 기여 정도다. 하지만 이누이트는 공헌 정도와 무관하게 얼마만큼의 필요가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다. 가족이 몇 명이고 어떤 사정이 있느냐를 중심으로 분배한다. 이기적이거나 배타적인 이익 욕구가 잘 안 보인다.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인기 다큐멘터리에 나온 부족, 입술 밑으로 나무를 길게 뽑은 조에족의 생활도 비슷하다. 사냥 후에는 능력보다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한다. 인간의 본래 모습에 가까운 원주민들은 서로 호혜와 협력 속에서 공존하는 삶을 영위한다. 성선설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본래 선한 인간을 망친 게 문명이고 사적인 소유 욕구다.

자연 상태 인간의 선함에 이끌렸던 앙리 루소의 그림에는 그의 성장 배경도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가난한 함석공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채무 문제로 집이 압류되고 가족이 흩어지는 고통도 겪었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홀어머니와 가족을 부양했지만, 가난으로 다섯 자녀와 부인을 잃기도 했다.

화가가 된 후 그림 수입으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고도로 발달한 서양의 산업 문명이 성실한 노동을 해온 한 예술가의 최소 생계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문명에 회의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당시 유럽에 퍼지던 '선한 원시인' 발상으로 다가선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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