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그날처럼 '퍼석' 낙엽이 비명…땅이 보낸 산불 위험신호
아물지 않은 ‘의성 산불’ 상흔

“그날(지난 7일) 밤도 이렇게 마르고 바람이 휙휙 불었어. 저기 송전탑이 펑하고 터졌다지. 불이 팍 번지고, 쳐내려왔어. 요 앞까지.” 주민 이분례(88)씨가 당시의 급박함을 생생히 전했다. 문무대왕면 산불은 메마름과 거센 바람을 업고 살기등등했다. 불국사까지 덮칠 기세였다.
같은 날 경북 영덕군 축산면 경정3리. 산불감시원 권영철(55)씨가 바람이 몰고온 추위와 긴장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지난해 3월 사상 최악의 산불이 이곳을 덮쳤다. 그는 “10년 가까이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다시 큰 산불 나기 ‘딱 좋은 날’이 이어지고 있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산불 위험 안전재난문자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주의’와 ‘경계’를 넘어 실제 발생 건수도 올 들어 이미 156건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56건의 세 배에 육박한다. 통상 3~4월 봄철에 빈발하는 대형 산불(피해 면적 100㏊ 이상, 24시간 이상 지속)도 이미 영남을 들쑤셨다.
낮은 습도와 적은 강수량, 그리고 높은 풍속까지. 권씨가 말한 ‘대형 산불 나기 딱 좋은 날’을 만드는 요인들이 심상찮다. 중앙SUNDAY는 기상청 기후 요소와 산림청 산불피해대장을 분석하고 실제 대형 산불 피해 현장을 찾았다. 산불 피해 이재민들의 임시 거처가 된 컨테이너를 방문하고 방금 진화를 마친 산에 직접 들어가 보기도 했다. 자연은 이미 ‘대형 산불 초비상’이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최장기 건조특보…강릉은 ‘사하라’ “강원·영남 바싹 마른 땔감이 됐다”
역겨웠다. 매캐한 줄만 알았는데, 드문드문 비린내도 풍겼다. 지난 19일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산불 현장. 임야 56㏊(56만㎡)나 태웠다. 그런데 주민 경인연(76)씨는 “멀리서는 잘 안 보이는 산불”이라고 했다. 낙엽과 풀, 그리고 나무 밑동까지만 태운 ‘지표화 산불’이란 얘기. 불이 낸 열에 절단된 소방호스와 진화대원이 미처 챙기지 못한 구조 전문용 장갑이 긴급의 징표들로 남아 있었다. 헬기 45대와 602명의 진화대원이 마을 30m 앞에서 불을 잡았다.


눈비 찔끔, 컨테이너 날릴 정도 강풍
문무대왕면 산불 현장을 찾은 이날 영남 지역 17개 시·군에는 건조특보가 발령됐다. 영남권 건조특보는 지난 16일까지 53일 연속 유지돼 사상 최장 기록을 세웠다. 산불이 난 지난 7일 경주 상대습도는 22.3%에 불과했다. 상대습도는 현재 온도에서 공기가 품고 있는 수증기량을 뜻한다. 건조특보는 4일간의 상대습도를 반영한 실효습도를 기반으로 발령된다. 권춘근 산림과학연구원 연구사는 “습도가 30%대가 되면 낙엽 수분이 10%대로 떨어지고 산불 가능성은 25배로 늘어나는 만큼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강릉시 경포동에서 산불조심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8/joongang/20260228120210573whsk.jpg)
경주처럼 백두대간 동쪽 너머가 올해 들어 유난히 건조하다. 영동 지역에선 2017년 이후 대형 산불이 10건 발생했다. 그중 강릉에서만 5건이다. 건조함이 큰 이유다. 올해 강릉의 상대습도는 하루 평균 37.8%. 지난해는 43.6%였다. 지난 23일엔 17.5%까지 떨어졌다. 습도 10~20%의 사하라 사막 수준이란 얘기다. 강릉에서 산불 발생 확률이 25배로 증가하는 ‘습도 30%대 이하’였던 날은 35일이나 됐다. 올해 발생한 7건의 강원도 산불 모두 이 ‘35일’ 중에 발생했다. 서 연구사는 “습도와 강수량·기온 등이 합해지면 산불 발생 확률은 ‘25배’를 넘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이에 더해 바람까지 세지면 피해 면적도 급증한다”고 우려했다.
“생전 비가 안 오다가 마침 그날 온 거야. 안 그랬으면 의성이 또 홀랑 탔겠지.”
지난 23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김재봉(80)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달 10일 인근 비봉리에서 난 산불은 바람을 타고 팔성리로 넘어오려고 했다. 그런데 ‘비’가 살렸단다. 94㏊를 태우고 꺼졌다. 6㏊만 더했으면 올해 첫 대형 산불이 될 뻔했다.
하지만 2.6㎜. 지난 21일 경남 함양에서 대형 산불이 나기 전까지 올해 강수량이다. 지난해는 그 13.6배인 35.4㎜였다. 이렇게 메마른 함양에만 올해 산불이 세 차례 났다. 지난 7일 0.6㏊, 지난 12일 0.1㏊를 태웠다가 축구장 327개 면적인 234㏊(추정)로 급격히 피해를 키웠다. 이시영 강원대 방재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올겨울 강원도와 영남은 바싹 마른 땔감이 된 상태”라며 “그나마 지난 24일 눈·비가 내려 함양 산불이 잡힌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마침 머리 위로 밤비버킷(물주머니)을 매달고 헬기 한 대가 청송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날인 지난 22일엔 청송(0.08㏊)에서, 이날엔 영덕(2㏊)에서 산불이 났다. 데자뷔. 지난해 3월 22일. 의성에서 난 대형 산불은 바람을 타고 안동·영양·청송을 거쳐 영덕까지 들이닥쳤다. 당시 진화에 나선 산림항공본부 산불공중진화대 이은학(34) 대원은 “전혀 다른,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산불이었다”고 평했다. 당국에서는 ‘경북 의성 산불’로 칭하지만 6개 시·군이 동시에 불길에 휩쓸렸다.
올해 강원 산불 모두 습도 30%대 발생

“세상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불꽃축제도 있구나 싶었어요.”
경북 영덕군 영덕읍에 거주하는 윤모(55)씨는 당시 방파제로 피신했다 고립된 100여 명 중 한 명이다. 온 동네 가스통들이 터져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단다. 산불이 꺼지고 집에 돌아오니 냉장고 세 대와 시어머니가 물려준 패물이 몽땅 녹아서 사라졌다.
그는 지금 10평(33㎡) 컨테이너에 산다. 걷기 명소로 뜬 영덕 블루로드에 마련된 빨간 지붕의 이재민 거처다. 이렇게 경북 의성 산불로 6개 시·군에서 이재민 돼 지난해 6월부터 컨테이너 생활을 하는 이들은 3900명에 달한다. 정춘자(81)씨는 “장판 난방으로 이 겨울을 견디기도 힘들지만, 찜통에서 살아가야 하는 여름이 벌써부터 두렵다”고 했다. 신모(69)씨는 “산불을 겪은 뒤로는 사람도 조심하고 낯선 차가 오면 번호를 꼭 기억해 둔다”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박혜연 동덕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산불은 주거와 직업의 상실, 신체와 생명의 위협까지 일으킨다”며 “적잖은 이재민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회피·경계 행태를 드러내기도 한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산불 당시 불길은 의성에서 이곳 영덕까지 51㎞를 12시간 만에 이동했다. 당시 바람은 최고 초속 20m가 넘었다. 지난 22일에도 이곳에 초속 20m의 바람이 불어 창고로 쓰는 컨테이너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산림과학연구원은 초속 6m의 바람과 경사 30도인 조건에서 산불이 바람 없는 평지보다 최대 78배나 빨리 확산한다는 연구 결과를 냈다. 서 연구사는 “초속 20m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형 산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강풍”이라고 설명했다. 영덕의 경우 올해 평균 풍속은 초속 3.6m. 통상 평균 풍속이 최고 풍속의 절반 정도임을 고려하면 ‘심심하면’ 초속 7m 이상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평균 풍속은 초속 3.4m였다.


경북 의성 산불은 9만9289㏊를 태웠다. 2017년부터 본격화한 대형 산불은 총 42건인데, 의성 산불은 다른 대형 산불 41건의 총 피해 면적 4만㏊의 2.5배를 단번에 삼켰다. 게다가 지난해 경북 의성, 올해 경남 함양에서도 보듯 대형 산불은 갈수록 남하하는 추세다. 2017~2019년엔 8건 모두 강원에서 발생한 데 비해 2020년부터 현재까지 대형 산불 34건 중 21건(62%)은 영남, 5건(15%)은 강원에서 났다.
대형산불 남하

…최근 6년 62% 영남서
기상청 관계자는 “겨울철 북서 계절풍이 불면 백두대간 동쪽 사면은 겨울 평균 강수량이 연평균 강수량의 6% 내외에 그쳐 겨울 가뭄을 겪기 쉽다”며 “여기에 바람이 산맥을 내려가면서 강풍을 동반하다 보니 대형 산불 가능성도 한층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낮은 습도와 적은 강수량, 높은 풍속의 ‘3박자’가 맞아떨어지면서 대형 산불 발생 빈도를 급격히 높이고 있는 셈이다. 통상 산불은 1~2월에 연간 건수의 20%, 3~4월에 50%가 발생하는데 올해는 이미 두 달 새 152건에 달한다. 향후 두 달간 380건의 산불이 날 수 있다는 얘기다.
단순 계산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은 ‘무설(無雪)’이다. 올해는 동해안과 영남에 눈이 좀처럼 쌓이지 않았다. 눈이 쌓여야 봄까지 서서히 녹으면서 땅의 수분량과 대기 습도를 높일 수 있다. 게다가 기상청은 지난 23일 오는 3~4월 강수량이 평년보다 적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교수는 “여러 조건이 정말 안 좋다. 그야말로 발등에 산불이 떨어진 격”이라며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간과하면 대형 산불로 인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주·안동·영덕·의성=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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