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정답 주는 시대지만, 인생엔 정답 없으니까”…철학에 빠진 20·30

김예정 2026. 2. 2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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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항상 옳을까’.

지난 20일 오후 7시, 20·30대 청년 8명이 이 질문을 주제로 토론을 하기 위해 홍대입구역 인근 칵테일바에 모여 앉았다. 참가자들의 직업은 중학교 도덕 교사부터 웹툰스튜디오 직원까지 다양했다.

호스트 강민우(31)씨의 진행으로 2시간30분 동안 이어진 모임에서 이들은 가족과 친구 사이의 갈등, 직장 동료와의 대화에서 느낀 점 등 주제와 관련한 각자의 경험과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또 질문했다. 한 참가자가 “가족은 너무 가까운 사이다 보니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하자 듣고 있던 30대 여성 장모씨가 “애덤 그랜트의 책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에는 ‘기버’(giver)와 ‘매처’(matcher), ‘테이커’(taker)란 유형 구분이 나온다.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하는 테이커를 사회에서 만난다면 손절하겠지만, 가족이 그러면 품게 된다”며 공감하는 식이었다. 애덤 그랜트는 조직심리학을 연구하는 교수다.

지난 20일 홍대입구역 인근 칵테일바에서 열린 철학모임 '더필로소피' 참석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김예정 기자


젊은층 사이에서 최근 이 같은 철학 모임이나 철학 공부가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2023년 4월 이후 ‘연령별 판매 신장률’ 자료에 따르면, 전 세대 중 오로지 20대에서만 전년 동월 대비 철학 분야 도서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했다. 20여명으로 구성된 운영진이 한달에 한번 직접 정한 철학 관련 주제로 토론모임을 여는 ‘더필로소피’는 2022년 처음 만들어진 후 회원 수가 꾸준히 늘어 현재 600명을 넘겼다. 한 모임당 4~5명 정도로 구성되며, 한달에 총 100여명이 모임에 참가한다고 한다. 폭발적이진 않지만, 철학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 세대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SNS)에서도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철학에 유행 밈(meme)을 결합한 콘텐트를 다루는 인스타그램 ‘철학투스타는 이렇게 말했다’란 계정은 지난해 8월 첫 게시물을 올렸는데, 6개월만에 팔로워 4만3000명을 모았다. 계정 운영자는 “요즘 젊은 세대는 무작정 ‘다 잘될 거야'라는 힐링보다 삶의 방향성을 잡아줄 단단한 가치관을 원한다”며 “청년들이 퇴근길 지하철에 삶의 본질 고민할 수 있길 바라며 콘텐트를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다니엘 더필로소피 대표는 “사랑이나 자유 같이 일상과 가까우면서도 깊게 고민할 기회는 드문 주제가 회원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라고 말했다.

20일 더필로소피 모임이 열린 칵테일바 복도에 붙어있는 모임 소개 포스터. 김예정 기자

이날 모임을 찾은 20대 여성 B씨는 “퇴사후 재취업을 준비중인데, 너무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생활에 직결되는 주제길래 관심이 생겨 와봤다”며 “AI는 나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답만 알려주지만 여기서는 각자 거쳐온 삶 안에서 느낀 고민을 나누면서 같이 답을 찾아간다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모임에 다섯 번째 참여했다는 직장인 남성 김모(30)씨는 “지인들 사이에선 가벼운 얘기만 해야 하는 분위기여서 깊이 있는 질문에 대한 갈증이 있다”며 “관점이 다른 또래들과 서로 질문 던질 수 있어 계속 찾고 있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철학 토론 중간 중간 각자 주문한 칵테일을 홀짝이며 가벼운 농담이나 위로도 주고받았다. 30대 직장인 A씨가 토론 중 “할 말 하는 T(사고형)인지, 감성적인 F(감정형)인지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며 MBTI(성격유형검사)를 언급하자 참가자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공감했다. 한 참가자는 직장상사에게 무리한 업무 지시를 받은 경험을 얘기했고, 30대 직장인 여성 이모씨는 “시간이 지나면 상황을 상사에게 솔직하는 말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며 위로를 건넸다. 모임을 마치고도 몇몇은 자리에 남아 응원하는 야구팀에 대한 이야기 등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한참 웃음 꽃을 피웠다.

이런 흐름에 대해 전문가들은 “디지털이나 인공지능(AI) 같은 기술에 피로도가 큰 젊은 세대가 오히려 멀게만 느껴졌던 철학을 통해 ‘좋은 삶’을 찾고 싶어하고, 그런 것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AI는 쉽게 답을 내려주지만 철학은 정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과정”이라며 “관점 다른 청년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잘살지 함께 고민할수록 사회 화합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이것이 철학을 찾는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정 기자 kim.ye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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