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전업 인간

2026. 2. 2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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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에서는 반려견을 ‘전업 강아지’라 칭하며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상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다. 전업 강아지의 주요 업무는 집안 순찰하기, 애교 부리고 간식 얻어먹기, 꼬리 흔들며 인간 반기기, 산책한다는 핑계로 인간 운동시키기 등이 있다. 우리 집에도 전업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 녀석은 평일 주말 상관없이, 심지어는 무보수로 최선을 다해 귀여움을 발산하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강아지들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병오년이 밝아진 지 어느새 두 달이 되었건만, 새해에 적응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게으르게 사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개만도 못한 인간인 모양이다.

자괴감에 빠지려는 찰나, 다둥이 엄마인 사촌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들과 드라이브를 가자는 것이었다. 옳다구나, 기분도 별론데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어린이집에 다니는 꼬맹이 둘과 갓난쟁이 하나를 데리고 어디에 가면 좋을까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강화도의 어느 한옥 카페가 떠올랐다. 온돌이 깔린 좌식 카페인지라 아이들을 의자에 억지로 묶어 둘 필요도 없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막둥이에게 수유할 수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너른 마당 코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도착한 카페를 아이들이 좋아함은 물론이요, 아줌마인 우리가 더 좋아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고, 뜨끈뜨끈하다!”

식혜에 매실차를 마시는 거로도 모자라 가래떡구이를 두 접시나 시켜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사장님께서 우리 테이블 위에 웬 찻주전자를 내려놓으셨다.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엄마들을 위한 선물이라 하셨다. “아아, 저는 엄마가 아니라 이모예요. 보세요. 저랑 하나도 안 닮았죠?” 조카들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던 사장님 얼굴에 돌연 화색이 돌았다. 그러고는 나이가 몇 살인지, 사는 곳은 어딘지, 직업은 무엇이고 결혼은 왜 안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셨다. 공짜로 얻어먹고 입을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장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한 끝에 의외의 제안을 받았다. 중매를 서고 싶은데 생각이 있냐는 것 아니겠는가.

“저 좋다는 남자가 없더라고요. 있었으면 벌써 갔죠.” “없었을 리가 없어. 눈이 높은 거야.” “제 성격이 특이한가 봐요. 다 도망쳐, 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 몰라?” “저 살림도 할 줄 몰라요.” “혼자 산다면서. 그럼 다 할 줄 아는 거야.” 중매 제안을 거절하려 농담으로 응수했지만 사장님의 노련함을 이길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 그저 흐흐 웃는 내게 사장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여자 인생은 너무 짧아. 사십 중반만 돼도 애 낳기가 어려워지잖아. 그 후로는 여자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 되는 거야. 한 번 갔다 오더라도 일단은 가 봤으면 좋겠어. 남자한테서 종자만 받으라는 말이야, 내 말은. 그럼 내 새끼가 남잖아.”

여자가 아닌 인간이 된다니. 이 말인즉 아내, 며느리, 엄마와 같은 역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와 진배없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씻기 귀찮아하는 남편을 눈엣가시처럼 여길 일도 없을 것이고, 안부 전화 좀 자주 하라는 시댁을 험담할 일도 없을 것이며, 시도 때도 없이 말썽을 부리는 아이에게 잔소리할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전업 인간’으로서 그에 걸맞은 도리를 다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잘 먹고 잘 자기,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기,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사람 때리지 않기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님은 중매 상대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두 명이 있거든. 한 명은 박보검보다 얼굴은 나아. 예전에 단역으로 배우 생활도 했었어. 근데 연예인 되는 게 쉽지 않더라고. 지금은 저기 어판장에서 일해. 근데 얼굴이 무슨 소용이야. 그놈이랑 결혼하면 아가씨가 벌어먹여야 할지도 몰라. 또 한 명은 인천공항에서 일하는데 아주 남자답게 생겼어. 성실하기는 또 얼마나 성실한지. 걔가 아가씨랑 딱 맞는데. 어떻게, 소개받을 거야, 말 거야.” 보통의 여자라면 안락한 미래를 위해 후자를 택할 테지만 나는 어판장 박보검이 당겼다. 역시 나는 여자가 아닌 전업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팔자인가 보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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