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흉내 못 낼 '절규', 휴민트엔 안 보였다
[박재우 기자]
2026년 2월, AI 영상 생성 모델인 '시댄스(Seedance) 2.0'이 보여준 파괴력은 가짜가 진짜를 완벽하게 흉내 내는 시대에 단순히 '몸으로 직접 찍었다'는 사실이 예전만큼의 설득력이 있을지 하는 의문 이 들게 했다. 물리 법칙과 광학적 질감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하는 AI의 진격 앞에서 류승완 감독이 고수해 온 '육체적 액션'의 가치는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최신작 <휴민트>는 이러한 기술적 범람 속에서 '인간이 직접 찍은 액션'의 진정성을 항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AI가 가장 쉽게 학습할 수 있는 관성적 서사와 장르적 클리셰에 매몰됨으로써 전통적 연출가가 직면한 창의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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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 |
| ⓒ 외유내강 |
대중이 그에게 열광한 것은 화려한 기술 때문만이 아니라 거친 주먹다짐 속에 담긴 하류 인생들의 비릿한 삶의 냄새와 생존 본능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가 내놓은 결과물 앞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의 액션은 여전히 누군가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정교하게 설계된 '전시물'에 불과한가.
서사를 집어삼킨 장르적 관성
<휴민트>는 이 질문에 대해 기술의 진화가 서사의 퇴행을 가리지 못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뼈아픈 답을 내놓는다. 류승완 영화의 고질적인 약점은 언제나 '액션 시퀀스 사이를 잇는 서사의 밀도'에 있었다. 초기작들에서는 그 빈틈을 감독 특유의 재기와 에너지로 메웠다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대작으로 넘어올수록 그 빈틈은 관성적인 설정들로 채워졌다.
<베를린>(2013)에서 보여준 남북 첩보물의 구도는 <모가디슈>(2021)를 거쳐 <휴민트>에 이르기까지 혁신 없이 변주될 뿐이다. 차갑고 유능한 북한 요원과 인간적인 고뇌를 가진 남한 인물이라는 도식은 이제 관객이 다음 대사를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뻔한 설정이 되었다.
이러한 서사의 빈곤은 자연스레 캐릭터의 평면화와 장르적 긴장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인 '휴민트(HUMINT)'란 사람을 매개로 정보를 수집하는 인적 정보 활동을 뜻한다. 이 제목을 내건 영화라면 첩보원과 정보원 사이의 은밀한 유대, 혹은 적국의 첩보망에 협조하는 인물의 실체가 탄로 날듯 말 듯한 심리적 서스펜스가 극의 중심축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영화는 첩보물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이 치밀한 공방전을 너무나 쉽게 포기한다. 공작의 실체가 고작 CCTV 영상 하나로 허술하게 노출되는 대목은 장르적 지능을 기대한 관객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든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이국적인 공간의 미장센을 구축하고 핏방울이 튀며 뼈가 부러질 듯한 액션을 구현하는 데 들인 압도적인 공력은 정작 관객의 심장을 조여야 할 첩보물 특유의 서사 완성도를 높이는 데 투입되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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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휴민트> 스틸컷 |
| ⓒ NEW |
이렇듯 인격적 고뇌가 거세된 액션의 공허함은 '성룡 키드'를 자처해 온 류승완이 정작 스승이 보여준 철학적 진화는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성룡은 2025년작 <포풍추영>을 통해 '늙어감'을 장르의 부품이 아닌 서사의 도구로 승화시켰다. AI가 설계한 완벽한 범죄망을 뚫는 것은 그의 화려한 발차기가 아니라 수십 년의 업이 쌓인 노장의 직관과 혜안이었다.
반면, 류승완은 <휴민트>에서 여전히 <베를린>(2013)의 전성기 문법에 매몰되어 있다. 성룡이 기술의 범람 속에서 '인간의 자리'를 재정의하며 액션의 이유를 증명할 때 류승완은 그저 잘 짜인 액션의 '전시'에 머물고 만 것이다.
결국 <휴민트>는 류승완식 액션의 기술적 도달점인 동시에 서사적 임계점이다. 시댄스 2.0이 단 몇 초 만에 정교한 영상을 생성하는 시대에 관객이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며 극장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고생해서 찍은 액션만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독창적인 서사와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이 결여된 리얼 액션은 낡은 유물의 전시회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제 류승완 감독에게 필요한 건 더 정교한 액션의 합이 아니라 성룡처럼 자신의 자리를 다시 정의하는 용기다. 그의 액션 서사시가 AI의 화려한 파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적 숙련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지독한 통찰과 서사의 깊이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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