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만석이었던 새벽 3시 45분 강남행 첫차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최문희 2026. 2. 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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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숲이 쓰고 강혜진이 그린, 출근길 마음 다잡아주는 그림책 <첫차를 타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기자]

우리는 평생 몇 번의 출근길에 오를까. 일 년 평균 근속일수가 261일이니, 최소 삼십 년간 일해도 7830일을 출근 도장을 찍기 위해 집을 나서는 셈이다. 버스와 지하철, 인도 위에서 분노의 질주를 내달리며. 보통 사람들의 출근길 역사만 모아도 시트콤 한 편이 뚝딱 만들어질 수 있겠다.

나의 첫 출근은 열아홉 10월이었다. 버스를 타고 대구 동성로에 내려 어마어마한 빌딩으로 들어가 작은 탈의실에서 유니폼을 꺼내 입고, 다시 어마어마한 빌딩 안 서점에서 선배를 따라다니며 온갖 출판사 목록과 고객 응대 메뉴얼을 외웠다. 20대 중반부터는 서울 합정에 자리한 출판사로 지하철을 타고 쏘다녔다. 지금은 천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출근길 분노의 질주를 한다.

6411번 첫차 타고 강남으로 향하는 사람들

빌딩에서 일할 땐 층마다 직원용 비상구가 있었다. 그 안에 어떤 풍경이 펼쳐졌을까. 사실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사람에겐 그나마 긴장을 풀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 진상 손님 응대 후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잠깐 아픈 몸을 달랠 때 효험이 있었다. 매장 동료, 경비 아저씨,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이 오아시스에서 곧잘 만났고, 우리는 작은 간식을 나눠 먹으며 고통을 달랬다.

삶은 그 시절보다 더 윤택해졌지만 팬데믹 이후, 살갑게 인사하고 정을 나누는 일은 분야를 막론하고 줄어든 것 같다. 그림책 <첫차를 타는 사람들>(2025년 5월 출간)은 일대면 소통이 희미해진 시대, 출근길 하루를 시작하고 퇴근길 하루를 마무리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단비를 내려준다. "묵묵히 출근한 당신, 오늘 하루 고생했어요" 촉촉한 인사를 선물하는, 전 연령이 함께 볼 수 있는 노동인권 그림책이다.
 <첫차를 타는 사람들>(김숲 지음, 강혜진 그림) 표지.
ⓒ 노란상상
이 책이 지어진 역사를 살펴보려면, 서울 6411번 버스의 노선을 참고해야 한다. 양천구에서 시작해 구로를 지나 강남 반포와 선릉역에 닿는 이 버스에는 빌딩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대거 탑승한다. 첫차는 새벽 3시 45분에 온다. 청소일로, 경비일로, 식당일로 나서는 사람들로 매번 만석이라 한 대에서 두 대로 증원됐다고 한다. 그렇게 새벽 공기를 가르고 두 대의 버스가 강남으로 향한다.

그림책은 "새벽 3시면 눈이 떠진다네"라는 텍스트로 시작한다. 오른쪽 페이지엔 여명이 트기 전, 쪽빛에 물든 정류장 장면이 펼쳐진다. 실제로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빌딩 노동자들 출근 시간은 대부분 새벽 6시. 그러나 첫차를 타고 무사히 근무지에 도착하려 이들은 부지런한 채비 끝에 새벽녘 6411번 승강장으로 향한다. 이 책은 그 어둠을 가르고 도착한 걸음을 묵묵하고 정겹게 응원한다.

색색의 뭉툭한 질감을 밝게 연출한 그림 작가는 사람들이 탄 버스 안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늘 비슷한 시간에 타기에 서로 얼굴이 익은 탑승객들은 "가방 이리 주소" 거들며 안부를 나눈다. 곧 정체되기 시작한 도로로 장면이 전환되고 "하루 밥을 벌러" 평상복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빌딩과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한다.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어 건물 속으로 스며든다.

유니폼 너머 '자기 존재'를 명랑하게 켜는 책

우리는 안다. 먼지 한 톨 없는 빌딩은 "가뿐 숨"을 내쉬며 곳곳을 청소하는 사람의 기술로 존재한다는 걸. 아파트 주변이 늘 깨끗한 까닭은 순찰하는 틈틈이 쓰레기를 치우는 베테랑 경비원의 노고 덕분인 걸. "사회적 계급이 낮은 노동자는 자신이 일할 때 입는 옷을 선택할 수 없"지만(<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 그들이 오랜 세월 해온 '필수노동'이 사라지면 "이 도시는 엉망"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을 끝내 '선택'하여 떳떳하게 오늘도 해내는 것이다.
 <첫차를 타는 사람들>(김숲 지음, 강혜진 그림) 본문 중에서.
ⓒ 노란상상
'필수노동'은 코로나19 이후 등장한 개념이다. 재난 상황에서도 사회 기본 기능을 유지해주는 직업군으로, 타인과 접촉이 불가피한 이들은 전염에 취약하다. 의료, 돌봄, 물류, 안전 분야에 분포하는데 경비원, 간호사, 조리사, 택배기사, 환경미화원 등이 속한다. 이들 유니폼에는 명찰이 붙어 있지만, 대다수는 '클레임' 걸 때만 눈에 불 켜고 이름을 확인 후, 고객이란 이름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들은 투명 인간으로 묘사된다. 빌딩에 광을 내고, 대형 밥솥에 밥을 짓고, 택배를 나르는 사람들을 그림작가는 회색 외곽선으로 여리게 표현한다. 글작가도 발맞춰 노래한다. "우리는 그저 이름 없는 사람. (중량) 조용해서 들리지 않는 사람. 투명 인간으로 사는 사람." 이어지는 장면은 점심시간. 변기 위와 트럭 짐칸에 도시락과 컵라면이 놓여 있다. 이들은 '투명 식사'를 하듯 끼니를 때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단단하고 명랑한 서사로 끝내 활보한다. "나도 이름은 있어" 말하는 인물들은 온전한 자기 존재("나도 누군가의 엄마라네")를 밝히고, 나의 일이 사회에 필수 역할을 하므로 냉대 받을 이유가 없음을 증명한다. "아줌마, 아저씨"로 불리는 현실을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몸 쓰는 일보다 머리를 쓰라고?" 내뱉는 몰상식한 발언들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유쾌하게 일축한다.

버스 하차 후 집으로 닿는 오롯한 저녁들

이야기 끄트머리, 종일 일하던 사람들의 전쟁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그림작가는 인물들의 퇴근 시간을 네 컷으로 표현해 펼침면 가득 보여준다. 땀내 나는 유니폼을 시원하게 갈아입는 이들은 경비원, 조리사, 청소원, 택배기사.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이들은 이른 새벽, 6411 버스를 함께 탄 탑승객들이다. 6411을 타고 돌아가는 이들은 "오롯한 나"가 되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러 간다.
 <첫차를 타는 사람들>(김숲 지음, 강혜진 그림) 본문 중에서.
ⓒ 노란상상
책의 백미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다. 청소원은 한 손에 통닭 한 마리를 든 채 발걸음이 가볍고, 종일 요리하던 조리사는 고양이와 침대에서 포근한 밤을 맞이한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택배기사는 된장찌개가 놓인 식탁에서 가족과 피로를 녹인다. 각자 소중한 것이 드러난 장면에서 노동자는 자기 취향과 기호가 있는 입체적인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일찍 잠든다. 다시, 첫차를 타기 위해.

고 노회찬 의원의 연설에서 비롯된 이 책은 '평화의나무 합창단'이 부른 곡 <첫차를 타는 사람들>을 작사한 글작가 김숲의 노랫말을 풀어낸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이웃의 "내일이 조금 더 다정한 날이길 희망"하는 강혜진 그림작가가 힘을 합했다. 그림책을 낸 출판사 노란상상은 미화원의 하루를 그린 <어둠을 치우는 사람들>,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일터를 그린 <오! 미자> 등 '노동인권 그림책 시리즈'를 꾸준히 내왔다. 어린이와 읽기에 탁월한 이웃의 이야기니, 펼쳐보길 권한다.

여전히 출근길은 억겁의 과업이고, 유쾌하지 않는 생존의 도돌이표다. 그래도 우리 삶 어딘가 살맛이 묻어난다고 말하는 이 그림책에서 단단한 아침의 기원을 본다.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간, 먼저 출발한 선배들의 기운을 이어받아 문간을 나선다. 오래전, 비상구 계단에서 사탕을 쥐어줬던 파란 작업복 언니의 품위를 따라서. 새벽을 열어준 기운들에게 배턴을 이어받는다. 어깨를 쫙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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