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거사 후 사망할 때까지 쏜 2백여 발의 메시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2. 2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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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20일 국내에 들어온 안중근 유묵

[김종성 기자]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이 20일 민주당 박찬대 의원, 유영렬 안중근의사기념관장, 김황식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장등과 함께 일본 도쿄도립 로카기념관에서 6개월간 대여받은 안중근 의사 유묵을 살펴보고 있다.
ⓒ 국가보훈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발사한 총알은 여섯 발이지만, 그 뒤에 또 다른 형태로 쏜 것은 2백 발이 넘는다. 그중 하나가 지난 20일 국내에 들어온 안중근 유묵이다.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라는 빈이무첨 부이무교(貧而無諂 富而無驕)가 쓰인 서예 작품이 6개월 대여 형식으로 일본에서 반입됐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트린 뒤 순순히 붙들렸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파견대로 붙잡혀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토를 저격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대한 만세 외칠 시간에 몸을 피하거나 총을 더 쐈을 것이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이토를 처단해 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뒤 일제 침략을 고발할 새로운 무대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스스로 붙잡혔다고 봐야 그의 이후 행보가 이해된다. 체포되는 그 순간부터 제2의 의거, 진짜 의거가 시작됐다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체포 직후부터 그는 메시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 거사 직후에 외친 '대한 만세'도 한국어가 아니었다. 1910년 2월 7일 공판 때 그는 "각국에서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코레아 후라라고 말하는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였다"고 진술했다. 그가 외친 코레아 후라는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어였다는 점이 오늘날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이 17세 때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라며 "내가 만일 프랑스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폐한 것이다"라고 알려준다. 이처럼 제국주의국가의 언어를 경계하던 안중근이 제국주의의 거물을 쓰러트리는 자리에서 비(非)제국주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로 대한 만세를 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중근은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도 계속해서 메시지를 발산했다. 일본이 말로는 동양평화를 외치면서도 실상은 동양평화를 해치고 한국 독립을 침해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들은 일본 정부 수뇌부에 속속 보고됐다. 거사가 없었다면, 일제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의거를 성사시킨 뒤 이처럼 열심히 선전한 일은 이토 처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

곳곳에 폭탄을 터트린 의열단원들과 약산 김원봉, 도쿄에서 히로히토를 저격하려 했던 이봉창, 상하이에서 히로히토 생일 잔치에 폭탄을 터트린 윤봉길 등은 안중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역사적 기여를 남겼다. 하지만 거사 직후의 메시지 관리 측면에서 안중근은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이것이 안중근 의거의 특징 중 하나다.
 1909년 안중근 장군이 이토를 격살한 중국 하얼빈역과 기념관, 유묵이 전시된 하얼빈공원(현 조린공원)
ⓒ 김종훈
거사 직후 안중근이 보여준 독보적 면모

안중근은 조사나 재판 외에 집필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거사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에 담았다. 수감 중에도 그는 이런 식의 투쟁을 이어갔다. 이제 그는 총 쏘는 사람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만난 일본인들과의 접촉도 메시지 발산의 기회로 삼았다. 유묵 증정이 그런 수단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체포돼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그는 마지막 한 달 동안 이런 유묵을 집중적으로 생산해냈다. 탄핵된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뒤이어 1925년 3월 제2대 임시대통령이 된 역사학자 박은식은 1915년 상하이에서 펴낸 <한국통사>에 이렇게 썼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생각이 한가하여 혹은 시를 읊으면서 스스로를 굳세게 하였으며,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라는 글을 써서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였다. 또 <동양평화론>이라는긴 글을 써서 자기 주장을 발표하였다. 일본인 또한 그의 의를 흠모하여 그의 필적을 구하는 자가 많았는데, 모두 응해주고 글씨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2백여 폭이나 되었다. 아! 안중근의 여유 있음이여."

<서경> 대우모(大禹謨) 편에 나오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라는 구절은 안중근이 순국 전날에 선사한 유묵에 나온다. 1910년 3월 30일자 <황성신문> '안중근의 절필'은 "안중근은 집형(執刑) 전일 여순옥리(獄裏)에셔 일(一) 일본인에게 절필로 서증(書贈)한 팔개 자(字)가 여좌(如左)하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여순감옥 내에서 한 일본인에게 마지막으로 증정한 여덟 글자가 왼쪽과 같다면서 '인심도위 도심유미'를 보여줬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인심유위 도심유미'가 안중근의 최후 유묵이다.

<서경> 해설서인 <서경집전>은 도심은 의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도심은 밝히기는 어렵고 어두워지기는 쉬우므로 은미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최후가 임박한 안중근은 어차피 위태로운 인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심마저 은미한 세상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덟 글자에 담아 일본인에게 선사했다.

<한국근현대사연구> 2023년 제104집에 실린 도진순 창원대 교수의 논문 '안중근의 근배(謹拜)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에 따르면, 안중근은 자신을 취조한 사카이에게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침략정책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 등이 적힌 유묵을 선사했다.

또 "장부는 죽더라도 마음이 쇠와 같이 굳건하며"가 적힌 유묵도 선사했다. 일본 정부에 신속히 보고될 수밖에 없는 이런 유묵들은 그가 의거를 일으킨 세계사적 배경과 더불어 죽음을 불사하는 태도를 일본 당국에 알릴 수 있는 메시지들이었다.

안중근이 쓴 그런 유묵들에서는 "경자 삼월 어(於)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근배"라는 글귀와 더불어 무명지가 짧은 그의 수인(手印)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순국한 마지막 달, 그가 순국한 공간와 더불어, 항일투쟁 의지를 불태우며 손가락을 훼손하는 단지동맹에 참여한 일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매우 강렬한 항일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돌아온 '빈이무첨 부이무교'의 경우에는 잔글씨가 깨알 같이 적혀 있다. 이 부분은 안중근이 쓴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의 출처가 <논어> 학이(學而) 편이라는 것, 뤼순소학교 교사 히시다 마사모토가 입수했다는 것 등이 적혀 있다. 안중근과 히시다 사이에 중간 매개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묵을 보면, 첫 번째 이(而)보다 두 번째 '이'를 좀더 흘려 썼음을 알 수 있다. 무(無) 역시 그렇다. "아! 안중근의 여유 있음이여"라는 박은식의 감탄처럼, 죽음을 앞둔 그달 3월에 안중근은 붓을 들고 그런 여유도 과시했다.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쏜 총알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인 네 명의 몸에 박혔지만, 그가 쏜 2백여 발의 유묵들은 훨씬 많은 당대인과 후세 사람들의 가슴에 박혔다. 이 유묵들은 지금도 수많은 가슴을 자극하며 안중근의 신념과 의지를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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