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관객이 1000만을 넘는다면
[박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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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량> 스틸컷 |
| ⓒ CJ ENM |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정의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베테랑>의 주먹에 열광했다. 그것은 단순히 나쁜 놈을 때려잡는 액션이 아니라 법망을 비웃는 권력층을 향한 대중의 억눌린 분노였다. <서울의 봄>을 통해서는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라는 집단적 각성과 함께 이미 지나버린 역사의 비극 앞에서 끝내 되찾지 못한 정의를 애도했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릴 때 <국제시장>과 <신과함께>는 각각 과거의 가족애와 사후 세계라는 판타지를 빌려와 대중의 불안을 다독이는 정서적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최근 <파묘>가 불러일으킨 신드롬 역시 단순한 공포를 넘어 우리 땅 밑에 깊게 박힌 역사적 상처를 파내어 어루만지고 싶어 하는 집단적인 자존감의 회복 과정이었다.
그 정점에 선 <명량>의 1761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는 단순히 화려한 전쟁 장면이 만든 게 아니다. 그것은 책임지는 어른이 부재하던 시대에 던진 대중의 절박한 탄원서였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설 때 홀로 대장선을 몰고 사지로 뛰어드는 이순신의 고독한 뒷모습. 부하들보다 앞장서서 죽음을 각오하는 그 리더십은 말뿐인 지시보다 강렬했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거대한 위로가 되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명제는 그가 선두에서 몸소 보여준 실천을 통해 완성되었고 대중은 그 뒷모습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책임'이라는 가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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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
| ⓒ 쇼박스 |
국가를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은 정쟁의 도구가 되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내 삶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무력감만 깊어졌다.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사람들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을 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그 차디찬 바닥 위에 도착했다.
이 영화는 화려한 왕의 복원기가 아니다. 박지훈이 연기한 소년 왕 이홍위는 그저 '철저히 무너진 인간'일 뿐이다.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절한 쓸모없음. 그가 흘리는 눈물에는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무기력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런 그를 품는 건 촌구석의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내 운명을 어찌할 수 없어 체념을 배운 '바닥의 사람들'이다. 잘난 왕과 못난 백성이 만난 게 아니다. "너도 참 답답하게 사는구나"라는 처절한 동질감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바닥에서 만난 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순간이다.
영화 속 '호랑이'는 우리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자 언제든 나를 삼킬 수 있는 현실의 공포다. 다 포기하고 싶었던 이홍위는 이 위기 앞에서 활을 든다. 여기서 그가 쏜 화살은 빼앗긴 자리를 되찾겠다는 욕심이 아니다. 나를 사람으로 봐주고 따뜻한 밥을 건넨 이들을 지키겠다는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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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 ⓒ 쇼박스 |
영화의 진짜 힘은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이 내어주는 투박한 밥 한 그릇에서 나온다. 잘잘못을 따지고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한 현실 세상과는 달리 스크린 속 사람들은 폐위된 왕에게 기꺼이 곁을 내준다.
사람이 사람을 가여워하는 그 당연한 마음이 최근의 추위에 얼어붙은 우리 가슴을 녹인다. 배신과 이기심이 생존을 위한 방식이 된 현실 속의 우리는 이 가상의 공동체를 보며 '사람의 온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결국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시대의 간절한 요청이다. 사람들은 이제 공허한 약속에 속지 않는다.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사나운 권력 대신, 내 아픔을 이해해 주고 같이 밥을 먹으며 위기의 순간 기꺼이 활을 들어줄 '곁'을 갈구할 뿐이다.
이 영화의 관객이 1000만을 넘는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웠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이 될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지금 대한민국에 도착한, 가장 뜨겁고 시의적절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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