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에 불합격한 밤, 저주받은 기타를 손에 쥔 가수의 운명
[김상목 기자]
'우진'은 누나 '시은'과 악기 수리점을 운영하며 틈틈이 가수의 꿈을 키우는 청년이다. 하지만 오디션에 꾸준히 참가해도 매번 탈락하고 만다. 이번에도 남매가 함께 출전하지만, 결과는 불합격. 낙담한 우진을 시은은 위로해주지만, 기운이 빠지는 건 도리가 없다.
시은은 먼저 귀가하고 홀로 생각에 잠긴 우진, 영업을 끝낸 가게에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고민하다 열어주니 수상쩍은 남자가 고물 기타를 내밀며 수리를 의뢰한다. 제대로 고치기엔 영 견적이 안 나오지만, 남자는 33개 부품을 갈면 괜찮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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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 스틸 |
| ⓒ 엣나인필름 |
한국 역시 다소 늦긴 했어도 케이블 채널 도입과 함께 뮤직비디오 열풍이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다. 한국판 MTV를 꿈꾸며 Mnet 등의 음악 채널이 탄생하고, 종일 여기에서 뮤직비디오가 재생된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단순하게 음악에 맞춰 배경화면을 조성하는 것에서 다양한 시도가 가미된다. 뮤직비디오에 비디오 아트와 영화적 요소가 본격 도입되기 시작한다. 화려한 댄스나 힙합 부류에 밀리지 않기 위해 발라드 가수들이 시선을 잡아끌 대작 뮤직비디오를 연달아 시도한다.
옆 나라 일본 경우도 흥미롭다. 국내에도 익숙한 이름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구로사와 기요시, 이와이 슌지, 나카시마 테츠야 등은 일본 정상급 아이돌인 AKB48이나 노기자카46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그들의 기존 작업과 연장선, 혹은 색다른 시도로 화제를 만든 바 있다.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팬과 공유하고 확장하고자 가수들 역시 영상화에 도전한다. 활동과 공연 실황 단순 기록영화를 넘어 영화 형태의 연출이 자연스럽게 감행된다. 국내에도 영향력을 일정하게 행사한 건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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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 스틸 |
| ⓒ 엣나인필름 |
솔로 가수로서 전 세계 공연 일정을 감행할 만큼 확고한 인기와 위상을 가진 WOODZ(본명: 조승연) 역시 자신의 군 전역 후 신보 및 공연 활동과 연계해 다른 가수와 차별화를 위한 영상 제작에 도전한다. 그런데 이게 흔한 공연 실황이나 홍보 비디오 차원이 아니다.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감독 박세영과 협업하고, 저스틴 H. 민과 정회린이란 선 굵은 연기자와 더불어 가수 본인이 연기에 도전한다. 그 결과물은 59분 분량, 극장 개봉용 영화로 완성된다. 음악의 영상화란 추세는 분명하지만, 이 정도로 과감한 시도는 흔하지 않다.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는 'Cinema' 규격에 부합하는 작업이지만, 전통적인 이야기 서사 위주로 전개되진 않는다. 제목부터 그런 색깔을 짐작하게 만든다. 기타를 연주할 때 줄과 줄 사이를 미끄러지듯 훑는 'Slide', 여러 줄을 긁어내는 'Strum'. 속도와 소리를 줄여 여백을 형성하는 'Mute'를 조합한 영화 제목은 이 작품에서 문학적인 서사는 '거들뿐',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처럼 다채로운 요소가 조합되어 공감각을 끌어내는 데 집중할 것을 예고한다. 마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시작부터 끝까지 공연을 즐기는 감각과 통하는 방식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우리가 신화와 고전에서 이미 익숙하도록 목격한 이야기, 예술에 미친 나머지 가장 소중한 것 – 영혼 같은 – 마저 희생하거나 교환하는 자의 사연이 펼쳐진다. 우진은 변두리 악기 수리점을 호구지책으로 삼지만, 반드시 가수로 무대에 서고 싶다. 그때 변장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수수께끼의 남자 '남기'가 문을 두드린다. 처음 봤을 땐 구제불능 고물 기타에 불과했지만, 묘하게 시선을 빼앗긴다. 난해한 설계도에 따라 조심스레 기타에 맞는 부품을 찾던 그는 어느새 기타에 혼을 불어넣듯 매달린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 그런 우진에게 다가오지만, 그의 갈망은 세속적 성공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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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 스틸 |
| ⓒ 엣나인필름 |
화면 가득히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 이미지엔 절제와 균형을 찾기 힘들다. 시각효과는 흥건할 정도로 넘쳐나지만, 요즘 흔해 빠진 말끔한 컴퓨터 그래픽 터치는 찾기 힘들다. 깔끔한데 뭔가 허전한 풍경 대신에 구질구질하고 눈이 아파질 법한데 묘하게 눈가에 꽂히는 과한 이미지가 철철 흐른다. 인물의 속내는 대사나 해설로 제시되지 않지만, 감각에 맡기면 어렴풋하게 유추할 수 있다. 흐릿해도 흥미로운 감정선이다.
우진은 성공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 누나는 꿈과 현실 사이를 단단히 발 딛고 서 있지만, 우진은 환상을 좇고픈 속마음을 감춘 상태다. 깊은 밤 불청객의 노크는 파우스트 박사를 찾아온 메피스토 악마의 유혹과 다르지 않다. 그는 정체불명의 기타가 가진 매혹에 빠지고, 이것이 자신의 꿈을 이뤄주리라 직감한다. 그렇게 수리점 기술자로서 의뢰인이 맡긴 물건을 자기 차지로 만든다. 기타의 재탄생 과정은 음악인으로 성공하는 경로와 합체한다. 성공을 맛보지만, 불안과 욕망은 쌍으로 우진을 옭아맨다. 이중의 욕구는 갈증으로 바뀌고, 주인공은 어떻게든 궁극의 기타를 독차지하려 한다.
타는 목마름 같은 욕망이 이끄는 길에서 우진은 '네가 선택한 길'이라는 듯 조롱하며 불쑥 돌아온 남기와 대면하고, 도플갱어 같은 존재와 마주한다. 갈증을 다스리려면 기타는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이 과연 만족일까, 아니면 파멸일까. 어쩌면 그 역시 결말을 예상하는 듯하다. 기타 줄에 긁힌 상처는 전염병처럼 손가락 끝에서 퍼져가고, '절대반지'처럼 자신의 운명과 연결되듯 시시각각 형상을 변이하는 기타는 주인공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 같다.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에서 성공을 위해 강박에 빠져 파멸로 향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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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 스틸 |
| ⓒ 엣나인필름 |
따라서 이 작품을 글로 풀이하기란 무척 난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일단 시청각적으로 목격해야 한다. 누군가는 과잉된 이미지와 사운드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다른 누군가는 속빈 강정처럼 현란하긴 한데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할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설명하기보단 '감각하라!' 외치는 듯 메시지가 선명한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의 감상법은 관객에게도 관행을 넘어선 도전을 요청한다. 그래서 영화가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때 어떤 부조화가 일어날지 오히려 궁금하다.
극장의 위기 속에 관성을 깬 파격 시도가 다양하게 펼쳐지는 중이다. 100년 넘게 영화 상영에 최적화한 극장 모델도 시험에 든 지 오래다. '블랙 큐브', '다크 큐브'라 불리며 정숙한 가운데 수동적으로 집중해 관람하는 게 궁극의 감상법으로 굳어진 포맷 역시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를 관람하며 현란한 질주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리고 머리가 저절로 흔들릴 텐데, 과연 극장은 이 변종과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정답을 찾기보단 이런 실험의 결과가 흥미진진한 법이다. 앞으로 계속될 영상 실험의 첨단에 선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작품정보>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
Slide Strum Mute
2026 한국 미스터리 쇼트 필름
2026.02.26. 개봉 59분 15세 관람가
감독/촬영/편집 박세영
각본 박세영, 오유경
원안 WOODZ
출연 WOODZ, 저스틴 민, 정회린
제작/제공 EDAM엔터테인먼트
공동제작 OS earth
배급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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