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일등보다 '강아지똥'이 되는 법
[김옥성 기자]
성적표의 숫자와 아파트 평수가 아이들의 계급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비교와 경쟁이 일상이 된 교실에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묻습니다.
"너는 몇 등이니?"
"어디까지 갈 수 있겠니?"
그러나 안동의 작은 교회 종지기로 평생을 살았던 권정생 선생은 전혀 다른 질문을 남겼습니다.
"너는 누구의 생명을 살리고 있니?"
그는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빌딩이나 명예 대신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남겼고, 자신의 인세를 굶주린 북한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의 삶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고, 교육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몸으로 증언한 한 편의 설교였습니다.
권정생의 문학은 단순한 동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승자 독식의 교육 현장에서 길을 잃은 우리 어른과 아이들에게 건네는 '생명 존중의 교육철학'이자, 불의한 시대를 향한 '조용한 저항의 교과서'입니다. 그의 작품을 다시 읽는 일은 곧 우리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는 일입니다.
1. '쓸모'의 재정의... <강아지똥>이 가르쳐준 구원의 교육학
우리 교육은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쓸모란 대개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인재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존재는 기능으로 환원되고, 아이는 스펙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강아지똥>은 이 가치관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존재인 강아지똥은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참새도, 병아리도, 흙덩이도 그를 밀어냅니다. 그는 '버려진 것'이고 '냄새나는 것'이며 '없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민들레 뿌리로 스며들어 꽃을 피워내는 거름이 됩니다. 꽃은 혼자 피어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의 희생 위에서 피어납니다. 여기서 권정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육은 '남보다 우월해지는 법'을 가르치는 일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내어주어 타자를 살리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까?
오늘날 교실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잘하니?"
그러나 권정생은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를 살리고 있니?"
버려진 존재 속에 깃든 존엄을 발견하는 눈.
낙오자라 불리는 아이 안에 숨은 가능성을 알아보는 시선.
성적이 아니라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교사의 인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꽃이 되라"고 말해왔지, "거름이 되어도 괜찮다"고 말해준 적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교육은 경쟁의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에 참여하는 일임을 <강아지똥>은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2. 역사의 목격자로 키우기... <몽실 언니>의 저항 정신
권정생의 교육관은 유약한 낭만주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몽실 언니>는 전쟁과 분단, 가난과 폭력이 한 소녀의 삶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아름답게 포장해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피해자 편에 서서 묻습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역사 교육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책임을 묻는 교육, 침묵하지 않는 시민을 기르는 교육입니다.
몽실이는 시대의 폭력 앞에서 연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품고, 가족을 돌보며, 끝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놓지 않습니다. 그의 저항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남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교실을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뉴스 속 전쟁과 갈등, 혐오와 차별을 매일같이 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함께 충분히 묻고 토론하고 성찰할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권정생이 보여준 교육은 아이들을 순응하는 개인이 아니라, 역사를 성찰하는 목격자이자 증언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불의 앞에서 질문할 수 있는 용기.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
<몽실 언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성공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지는 사람'으로 키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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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실언니 권정생선생님의 『몽실 언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성공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지는 사람’으로 키우고 있습니까? |
| ⓒ 창비 |
권정생 선생은 평생 안동의 작은 흙집에서 살며 무소유를 실천했습니다. "적게 소유해도 충분하다"는 그의 삶은, 더 많이 가져야 더 가치 있다는 오늘의 교육에 대한 조용하지만 단호한 반론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꿈을 묻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어떤 직업'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이 질문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권정생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지배자가 아니라 동행자입니다. 자연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대상입니다. 길가의 풀 한 포기, 작은 벌레 하나도 형제로 여겼던 그의 생태적 감수성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더욱 절실한 가르침입니다.
빨리 소비하는 대신 오래 사용하는 법.
이기는 대신 함께 사는 법.
더 갖는 대신 더 나누는 법.
그에게 공부란 시험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태도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람이 되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나가며... 우리 아이들에게 '권정생'을 읽힌다는 것
권정생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제발 싸우지 마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그의 평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경쟁보다 화해를, 승리보다 생명을, 소유보다 나눔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실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에게 '합법적으로 이기는 법'만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토론은 하지만 경청하지 않고, 성취는 말하지만 연민은 말하지 않는 교실은 아닙니까?
아이들에게 권정생을 읽힌다는 것은 슬픈 동화 한 편을 읽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들 마음속에 '연민의 눈물'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하늘을 발견하는 영성의 눈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교사들에게도 묻는 일입니다.
"나는 꽃이 되려 애쓰는가, 아니면 거름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새 학기를 준비하는 교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던질 것입니까?
성취의 목표입니까, 아니면 존재의 질문입니까?
강아지똥처럼 낮은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고,
몽실이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냈던 권정생.
그의 삶과 철학이 경쟁으로 지친 우리 교육 현장에 다시 민들레 꽃처럼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학기, 우리 교실에서만큼은 아이들이 "몇 등이니?" 대신 "괜찮니?"라는 질문을 더 많이 듣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옥성 교육희망네트워크 상임대표, 하늘씨앗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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