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즐거움

오길영 2026. 2. 2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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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의 뾰족한 시각]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

[오길영 기자]

요즘은 학교에서 세계사 교육도 거의 안 한다고 알고 있지만, 근대의 출발점으로서 르네상스 인간주의(humanism)가 꼽힌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런 인간주의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로 변질하였다고 판단한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과 이성을 강조하며 중세 신학적 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했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연을 통제하는 주체로 완벽하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범박하게 정리하면, 17세기 근대 과학혁명,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인간 이성의 이름으로 확고하게 정당화했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정착, 민족국가(nation-state)의 형성은 이런 세계관을 국가와 사회 체제에 새겼다. 물론 전 세계가 이런 유럽의 인간중심주의에 처음부터 동조한 것은 아니다. 현대적 인간중심주의는 비유럽 세계(아시아, 북유럽 원주민,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 내재한 사유가 아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유럽 근대 문명이 식민주의 팽창과 함께 세계로 퍼지면서 인간중심주의는 보편적 이념으로 각인되었다. 비유럽 지역의 자연관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관계적 존재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그렇다고 비유럽 지역의 자연관을 섣불리 낭만화하거나 생태적이라고 일반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기후 위기가 또렷하게 보여주는 현대문명이 처한 위기의 뿌리가 인간중심주의라는 걸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반(反)인간주의, 혹은 탈인간주의(post-humanism)가 등장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따져보려는 모색도 나타난다. 계간 <황해문화> 129호(2025년 겨울)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a Haraway)의 급진적인 사유를 제시하는 기획이 실렸다. 거기 실린 글들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의식사학과와 페미니스트 연구학과 명예 교수인 도나 해러웨이
ⓒ 위키미디어 공용
해러웨이는 현재 인류 문명의 위기가 인간이 자연을 잘 관리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것이 전통적인 생태주의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서 사유한 방식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전통적 생태주의는 인간을 자연을 파괴한 주체이자 동시에 자연을 구원할 책임을 지닌 독립적 주체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활동하는 주체이고 자연은 죽어 있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단독 행위자가 아니다. 미생물, 동물, 식물, 기술, 물질과 함께 살아온 공생적 존재이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공생(sympoiesis)은 조화롭고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갈등과 불균형, 착취와 의존이 뒤엉킨 불편한 얽힘이다. 따라서 인간을 다른 존재와 분리해서 규정하려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관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정체성은 없다.

"나의 몸조차 전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라는 세속적 공간을 구성하는 전체 세포 중 약 10%에서만 인간 게놈이 발견된다. 나머지 90%의 세포는 박테리아, 균류, 원생생물 등의 게놈으로 차 있고, 나는 나보다 훨씬 수가 많은 이 작은 반려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한 사람의 인간 어른이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 분명, 지금 이 세계를 움직이는 인간중심주의, 인간 예외주의의 이야기보다 더 나은 이야기가 있다." (<황해문화> 2025년 겨울호)

해러웨이의 말대로, "지구생명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왜 혼자가 아닌가? 자립(自立)이라는 말은 인간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부각하는 개념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어떤 것도 실제로 자율 생산적이거나 자기-조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가 곧 물질이다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은 해러웨이의 사유를 시적 표현으로 제시한다. 시집 제목부터가 인상적이다. "시와 물질"은 무슨 뜻인가? 결론을 당겨 말하면, 시는 세상의 물질과 따로 존재하는 고고한 존재가 아니다. 시가 곧 물질이다. 역으로 물질도 시가 될 수 있다.

"헤모글로빈 분자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낸 호프만에게/ 시란 어떤 것이었을까/ 시와 물질,/ 또는 시라는 물질에 대해 생각한다/ 한 편의 시가/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시와 물질> 부분)

인간의 언어를 고도로 활용한 결정체인 시는 단지 인간의 것만이 아니다. "헤모글로빈 분자"가 지닌 "아름다움"을 읽어낸다면, 그때 분자는 시가 된다. "시라는 물질"을 바라보는 태도가 문제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고, 인간 안에서도 수많은 차이(인종, 계급, 성, 세대 등)를 근거로 차별과 배제가 이뤄지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고 일부러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힘 있는 자들이 득세하는 시대,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시인이 토로하는 비관주의에 공감하며, 나는 얼마 전 출간한 평론집에서 나희덕 시집 <가능주의자>를 평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가능(可能)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가능주의자> 부분) 시인도 어쩌면 이런 것이 '가당찮은 꿈'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렇게 현대문명과 자본주의의 힘은 강해 보인다. 그래도 시인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역설적으로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 가당찮은 꿈에 동참하자고 권유하는 사람이다."(오길영 <희망의 비평>)

이제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취약한 목격자들"(<여섯 번째 멸종>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자연의 물질을 죽은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그러면서 가장 지성적인 존재라고 우쭐대는 헛똑똑이가 되었다.

"물방울은 삼천 년 전의 세계를 기억하고 있을까/ 칠레 남쪽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바다를 가족처럼 여기던 물의 유목민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믿었고/ 조상들과 교감하려고 몸에 별을 그렸다/ 물의 유목민들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물의 눈동자가 움직일 때> 부분>

인간중심주의의 토대인 이성주의, 과학주의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믿었고/ 조상들과 교감하려고 몸에 별을 그렸다"는 "물의 유목인"이 지닌 지혜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과연 그럴까? "그가 녹음한 소리풍경은 말해주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잃어가는지, 잃어버릴 것인지."(<소리풍경> 부분) 따지고 보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잃어가는지, 잃어버릴 것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
ⓒ 문학동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깨닫는 것이다. 그 출발은 인간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근육과 혈관 속의 세포들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중/ 대체 무엇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방금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간 사람,/ 그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세포 몇 개가 사라졌겠지/ 진화는 세포들 사이의 사건,/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아름답고 복잡한 것은/ 박테리아와 미토콘드리아 덕분이라고 마굴리스는 말했지."(<세포들> 부분)

현대 과학과 생물학이 보여주듯이 인간 개체의 몸조차 계속 변환한다.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 않다. "근육과 혈관 속의 세포들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중"이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려면 이미 '나' 안에 들어 있는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개미가 더듬이로 진딧물을 자극하면/ 진딧물은 달콤한 즙을 내놓지요/ 개미는 무당벌레로부터 진딧물을 보호해주고요/ 공생은 서로 돕는 게 아니라/ 이용하고 착취하는 거라고 진화생물학자들은 말하지요/ (중략) 요즘 내가 궁금한 것은/ 진딧물의 맛/ (중략) 개미의 더듬이가 진딧물을 스칠 때/ 진딧물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즙을 내뿜는지/ 과연 개미는 개미 자신을 위해서만/ 진딧물은 진딧물 자신을 위해서만 물기 어린 손을 잡는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인지"(<진딧물의 맛> 부분)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매사에 '나'를 내세우는 자아 비대증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세계 안에서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이 아닐까?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그런 즐거움을 알도록 도와주는 독특한 물질이다.

"평생 뉴욕 이스트 10번가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던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은 유리창 너머에서 일어나고 지나갔을 뿐/ 누군가의 왼쪽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게/ 사진의 목적이라는 그의 말처럼."(<유리창 너머> 부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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