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중년] 설날 선물로 받은 로또 봉투 속에 든 것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2월엔 내가 가진 복 타령을 해봅니다. <편집자말>
[손미희 기자]
한동안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어릴 때 눈밭을 굴러 도로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때마침 내 위로 대형 트럭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모두 고개를 돌렸다. 나는 거대한 바퀴 사이에 놓여 있어서 살았다. 사립초등학교 추첨 때는 그 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오빠가 추첨 줄에 서 있다가 그게 당첨이 됐다.
그 뿐이랴.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내 내신 성적은 목표 대학의 최소 내신 기준에 간당간당했다. 그런데 그 해는 물수능이어서 성적이 올랐고, 본고사를 얼마나 잘 본 건지 어리둥절하게 과 수석으로 입학을 했다. 물론 그 뒤로 장학금은 받지 못했다. 결혼은 내 인생 최대 '운빨로맨스'였다. 몇 번 만나지 않고 결혼했는데 나보다 성질이 착한 남편을 만났다.
요행이 아니라 인복
며칠 전, TV 예능에서 신동엽과 탁재훈이 당구 맞대결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당구의 신'이라는 그들에게도 그런 공이 오는 순간이 있었다. 노린 각이 아닌데 쿠션을 맞고 돌고 돌아, 기가 막히게 들어가는 공. 한마디로 요행인 공.
말하자면 나는 인생에서 그런 공으로 점수를 꽤 땄다. 실력은 늘 애매했는데 결과는 이상하게 괜찮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착각했다. '나는 되는 인간인가보다.' 이쯤 되면 노력은 슬쩍 뒷자리로 밀린다. '뭐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겠지?' 요행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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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또 용지가 든 봉투 빨간색 봉투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지 않은가. |
| ⓒ 손미희 |
"당신 로또 떨어졌더라?"
다음 날, 차에서 로또봉투를 발견하고 큐알 코드를 찍어 본 남편이 놀리는데 심통이 났다.
"로또가 아무나 되나?"
아무렇지 않게 말은 했지만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곱게 접힌 빨간 봉투를 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봉투 속에 든 마음을 간직하고 싶었다. 내 행운을 빌어주는 그녀의 마음은 돈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낙첨이었지만, 봉투 속에는 로또만큼 귀한 마음이 있었다. 돌아보니 요행밭이라 생각한 내 인생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이건 요행이 아니라 인복이었다.
내 사립학교 추첨 복은 오빠가 잡아다준 것이었고, 팍팍한 서울살이에 입맛까지 잃을까 고향 반찬을 부쳐주던 어른들은 다 친정엄마의 친구들이었다. 내신이 떨어질 때마다 수업시간에 내 이마를 향해 분필을 던져주던 담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목표 대학에 지원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유학 시절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지 못해 끙끙댈 때 이타심이 남달랐던 미국인 친구가 내 곁에 없었다면 졸업이나 했을까.
인복은 평소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등판한다. 몇 년 전, 남편의 직장 문제로 1년간 미국을 따라 갔다 와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출국 전, 어쩌다 넘어져 발목 인대가 끊어졌다.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날 위해, 이웃들은 다 같이 팔을 걷어붙이고 집 정리를 도왔다. 묵은 김치를 갖다버리고 오래된 쌀로 떡을 하고 같이 나눠 먹었다.
빈 집에 문제가 없도록 1년간 자기들 집처럼 환기를 시켜주고 우편물을 모아줬다. 내 인복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걸까. 그러고 보니 나는 그들과 꽤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며 육아의 눈물 젖은 빵을 나눠먹으며 살았다. 그러니 그들이 누워 있었다면 나라도 팔을 걷어붙였을 것이다. 내 인복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랐다. 함께 비를 맞고 눈보라에 다져지며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난 복이었다.
복은 받는 게 아니라 쌓는 것
그래서일까. 새해 들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복은 받는 게 아니라 쌓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인복은 차곡차곡 관계 속에서 쌓여 있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자가 붙어 돌아온다. 어떨 땐 은행이자보다 세다. 어떤 순간에는 '돈'이 아닌 '사람'이 인생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궂은 날을 대비해 평소에 노력을 하면 무조건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아쉽지만 꼭 그렇진 않다. 경험상 열 번 노력한다고 열 번의 복이 찾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주변에서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는 그저 약속을 잘 지킨 것뿐인데 일자리 복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새로 이사 온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준 것뿐인데, 어느 날 내게 은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거창하게 선한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기적인 얌체로 늙지는 말자는 마음은 있었다. 그 마음이 쌓였던 모양이다. 이런 마음이 쌓여 복을 만날 확률을 높이고, 그런 태도가 내 곁에 복을 잡아둔 게 아닐까.
중년이 되니 머리카락 줄 듯 요행이 점점 줄어든다. 대신 선택의 결과가 적나라해진다. 이제 대충대충은 잘 통하지 않고, 어설픈 위장은 금세 들킨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이 나이에 아직도 요행을 바라면, 그건 낭만이 아니라 무모함이다. 중년의 그늘이 주는 안정감을 떨치고, 이제 한 번쯤은 뭐라도 제대로 해보려 한다. 글쓰기도 그 노력 중 하나다.
복도 눈이 있다. 아무데나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러니 이젠 복 많이 받기를 기대하지만 말고 성실하게 스스로 복을 쌓아가는 게 어떨까. 나이 먹고 뭐하는 거냐며 억울해 하지 말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도 요행만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지난 수고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한다. 내 경우, 한 방보다는 한 사람이었다. 내 결론은 그렇다. 인생의 몇몇 순간, 기분 좋은 운은 스쳐갔지만, 복은 결국 사람의 얼굴을 하고 왔다. 비록 정직한 배를 가진 별 볼일 없는 중년이지만, 곁에 사람이 있으니 낙첨된 로또 봉투 하나에 감사할 일이 생겼다.
날도 풀렸는데 로또를 선물한 동생에게 밥이라도 사러 나가야겠다. 같이 커피도 마시면 또 웃을 일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요행 대신 복을 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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