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으로 불린 여자의 마음을 두드린 남자, 어떤 청춘의 사랑법
[장혜령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파반느>는 유토피아 백화점에서 일하는 세 남녀의 청춘과 행복을 그려나가는 멜로드라마다. 각기 다른 상처를 품었던 세 인물이 어둡기만 했던 인생의 막막함 속에 서로의 빛이 되어준다. 영화 제목 파반느는 왈츠보다 느린 춤곡을 뜻한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에서 영감받아 작곡한 연주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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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파반느> 스틸컷 |
| ⓒ 넷플릭스 |
애초 극장 공개를 목표로 제작되었으나 넷플릭스에서 지난 20일 공개되었다. 극장용 영화라 스크린에 보는 맛이 없어 아쉬웠으나 OTT로 보는 장점도 있다. N차 관람, 여러 번 곱씹어볼 만한 요소도 다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한 낭만 가득한 대사, 명언 같은 글귀, 익숙한 듯 새로운 음악이 몇 번이고 되돌려 보게 한다. 소설과 영화 모두 훌륭해 둘 다 접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탈주>로 청춘의 얼굴과 성장담을 그려냈던 이종필 감독의 신작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후 작품을 봐 온 사람이라면 공통된 인장을 찾아볼 수 있다. 십 대 시절 영화와 극장 사랑에 눈뜨게 만든 멜로 영화를 향한 러브레터다. 이십 대 때 박민규 작가의 소설을 접한 이종필 감독이 직접 인칭과 시점을 바꿔가며 필사까지 한 애정을 바탕으로 각색 작업에 매진했다. 세련된 미장센부터 인물 표현의 공들임, 편집과 호흡의 리듬감, 음악적 감각 등. 그의 취향과 잔향을 경험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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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파반느> 스틸컷 |
| ⓒ 넷플릭스 |
'그녀'도 김미정(고아성)이란 고유한 이름으로 거듭났다. 보자마자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고 해 '공룡'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가난과 외모 콤플렉스로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빛으로 이끄는 경록을 만나 서서히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최고 성적으로 뽑힌 정직원이나 외모 때문에 부서를 옮겨 다니다가 지하 비품 창고 붙박이가 되었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견디는 것보다 오히려 편했다. 차츰 경록의 관심을 받게 되자 조금씩 안색이 환해진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꾸밈없는 솔직함이 공허한 경록의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준다.
'요한'은 박요한(변요한)으로 둘을 이어주는 오작교가 되어준다. 사랑을 받아 본 적도, 해본 적도 없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도 사랑 예찬론자다. 항상 밝은 성격을 유지하는 건 어두운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우주급 친화력과 넉살의 소유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이다. 록 음악과 고전영화, 데이비드 보위만 있다면 어디든 좋다는 이상주의자다. 트레이드마크인 탈색 머리는 요한이 겪은 상처의 일부이며, 자라난 검은색 머리카락은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을 상징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전사를 공유하는 경록과 요한은 영혼의 샴쌍둥이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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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파반느> 스틸컷 |
| ⓒ 넷플릭스 |
독립적이고 강인한 캐릭터를 내려놓고 자신 그대로를 꺼내 보였다는 고아성의 진심 어린 눈빛이 작품 물들인다. 10kg 증량하고 특수 분장으로 만든 미정의 외모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사랑스러워진다. 거기에 신예 문상민의 해사함이 더해져 조화로운 삼각구도가 완성되었다. 190cm가 넘으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경록 그 자체를 연기한 문상민의 영화 데뷔는 인상적이다. 긴 팔다리를 이용한 춤 선을 선보여 현대무용수를 꿈꾸는 경록의 개연성을 구축했다.
19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의 분위기와 1990년대와 2000년 초반 한국, 일본 멜로 영화의 오마주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프닝인 경록 부모의 만남부터 인상적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이 떠오르는 식당 장면부터, <아비정전>의 엔딩 장면이 교차된다. 라면 먹고 싶다는 암시는 <봄날은 간다>, 진심을 숨긴 채 다른 사람을 만나는 행동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슬란드의 아름다운 풍경도 덤이다.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었던 경록의 꿈을 이룬 마지막 장면은 실제 소수 스태프만 꾸려 다녀온 결과다. 경록과 미정이 LP 바에서 즐겨 듣던 흘러간 가요는 이민희 음악감독이 맡았다. 옛날 가요 같지만 만들어진 오리지널 스코어다.
영화는 누구나 사랑을 꿈꾸지만 누구나 사랑이 힘들어진 시대, 휘발되어 버리지 않는 사랑의 고귀함, 찰나의 소중함을 담았다.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다양한 심상을 전한다. 판타지 같은 동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잔혹동화의 느슨한 경계가 오랜 여운을 남기는 까닭이다.
세 사람은 서로를 통해 영혼에 불을 밝히는 존재가 되어준다. 그래서일까. 요한의 대사처럼 '모든 사랑은 오해다'라는 단언에 동의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할 거란 오해, 사랑이 영원할 거란 오해로부터 시작되는 가짜 같은 진짜에 매혹되었다.
삶에 상상이 필요하다는 데도 묘하게 설득된다. 우연과 필연의 작은 오해 하나만 있다면 인간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랑은 어쩔 수 없이 노력과 극복의 결과라는 현실도 깨달았다. 상대가 나를 사랑해 주길 원한다면 나부터 사랑해야 하고, 쌍방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믿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인디언들은 드넓은 초원을 달리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며 느린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려 준다고 한다. 경록은 유난히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지만 멈추어 미정과 요한을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고 상상하며 기다려주면 된다고 읊조리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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