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넣었더니 돈이 나왔다

김봉석 2026. 2. 2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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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자다르의 무인 회수기 체험기, 실질적 보상이 만드는 완벽한 재활용

2024년 5월, 안정을 뒤로하고 동반 퇴사한 40대 부부입니다. '조기 은퇴'라는 로망 너머의 치열한 현실과 길 위에서 마주한 삶의 가치들을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기자말>

[김봉석 기자]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일상은 한국보다 훨씬 느릿하게 흐른다. 은퇴 후 이곳에서 마주하는 시간은 억지로 채우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한 행복감을 준다. 하지만 이 평화롭고 여유로운 도시에서도 유독 사람들이 생동감 있게, 아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장소가 있다. 바로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구하기 위해 들르는 대형 마켓이다.

마켓 안을 걷다 보면 사람들 틈에서 묘한 풍경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빈 플라스틱 병과 알루미늄 캔을 가득 담아 마트 구석으로 바삐 향하는 이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엔 그들이 쓰레기를 수거하러 온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다. 알바니아나 세르비아를 여행하며 보았던, 생존을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던 이들의 풍경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견 섞인 의구심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쓰레기 적치장이 아니라, 벽면에 세련되게 매립된 낯선 기계 앞, 바로 무인 회수기(Reverse Vending Machine, 이하 RVM)였다.
▲ 자다르 마켓의 환경 지킴이, RVM 기계.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스파르(SPAR) 마켓에 설치 된 무인 회수기. 모아둔 페트병과 빈 캔들을 RVM에 하나씩 넣고 있다.
ⓒ 김봉석
자다르의 주요 마켓인 스파르(SPAR), 리들(Lidl) 등 어디를 가든 이 기계는 마치 붙박이장처럼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뜻 보면 커피 자판기처럼 생겼지만, 기능은 정반대다. 돈을 넣고 물건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건(빈 병)을 넣고 바우처(Voucher) 영수증을 받는다.

우리는 일찌감치 이 유용한 정보를 접하고, 일상 속에서 배출되는 재활용품들을 차곡차곡 모아왔다.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자원을 비축한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며칠 동안 모아온 '자원'들을 든든하게 챙겨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스파르 마켓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자원순환의 현장

사용법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정교하다. 기계 전면의 둥근 구멍 안으로 빈 병을 하나씩 밀어 넣기만 하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페트병이 찌그러지지 않아야 하며, 바코드가 온전하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계 내부의 센서가 바코드를 인식해 이 병이 보증금 환급 대상인지, 재질은 무엇인지 순식간에 판별하기 때문이다.

"드르륵, 덜컹."

병을 밀어 넣을 때마다 기계는 기분 좋은 기계음을 내며 병을 안쪽으로 삼킨다. 마치 배고픈 짐승이 먹이를 받아먹듯 경쾌하다. 가끔 병을 거꾸로 넣거나 바코드가 가려지면 기계는 "삐" 소리를 내며 무심하게 병을 뱉어낸다. '어이쿠, 이런이런 미안미안' 나도 모르게 혼자말로 기계에게 사과를 하며 병을 정방향으로 고쳐 넣는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도 덩달아 놀랐지만 그런 행동이 어이가 없었는지 깔깔거리면서 웃는다.

▲ 빈 병이 바우처로 바뀌는 30초의 경험. 기계의 둥근 구멍 안으로 PET병을 넣으면 바코드를 인식해 자동으로 분류하고 모든 과정이 끝나면 출력된 바우처 영수증으로 해당 마켓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 김봉석

우리가 오늘 가져온 품목은 캔 4개와 페트병 5개. 기계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숫자가 올라간다. 캔 하나당 0.10유로, 페트병 하나당 0.10유로. 모든 병을 다 넣고 'Isplata(결제)' 버튼을 누르자 "찌이익" 소리와 함께 바코드가 찍힌 바우처 영수증이 출력되었다.

총합 0.90유로. 한국 돈으로 약 1,500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누군가에게는 과자 한 봉지 값일지 모르나, 은퇴 후 낯선 타국에서 생활하는 우리 부부에게 이 종이 한 장은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우리가 지구를 위해 실천한 작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캔 4개, PET병 5개가 만들어낸 0.90유로의 가치. 직접 기계를 사용하여 받은 바우처 영수증. 이 영수증을 마켓 계산대에 제시하면 즉시 해당 금액만큼 할인을 받을 수 있다.
ⓒ 김봉석
유럽 환경 철학의 정수, '판트(Pfand)' 제도

사실 이 시스템은 유럽 여행자들에게는 '판트(Pfand)'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소비자가 음료를 살 때 병 값을 일종의 '보증금'으로 미리 내고, 빈 병을 반납할 때 그 돈을 돌려받는 방식이다. 자다르를 포함한 크로아티아 역시 이 유럽 표준의 환경 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판트 제도의 핵심은 '생산자 책임 재활용(EPR)'의 완벽한 구현에 있다. 제조사는 병을 회수하기 쉬운 구조로 만들고, 마트는 회수 거점이 되며, 소비자는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재활용에 참여한다. 누구 하나 손해 보는 이 없는 이 삼각형의 구조가 유럽의 높은 재활용률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자다르의 마트에서 본 흥미로운 광경 중 하나는, 노숙인들이 거리의 패트병, 캔, 빈 병을 수거해 이 기계 앞으로 오는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는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이 있다면, 이곳에는 빈 병을 줍는 이들이 있다. 시스템이 보상을 보장하니 쓰레기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계가 되고, 도시는 자연스럽게 깨끗해진다. "도덕에 호소하기보다 이익에 반응하게 하라"는 경제학의 격언이 마트 구석의 RVM 기계 안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한국의 분리 배출, '성실함'이라는 필터 뒤에 숨은 숙제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고국의 풍경이 떠올랐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분리배출을 가장 성실히 수행하는 국가로 손꼽힌다. 아파트 단지마다 정해진 요일이면 주민들이 모여 플라스틱과 병들을 분리하고, 라벨지를 떼어내며 정성을 쏟는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이 일사불란한 분리배출 문화다.

그러나 한국의 시스템은 시민들의 '무보수 노동'과 '윤리적 책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분리배출을 잘한다고 해서 내 지갑에 100원이 즉각 들어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실수로 잘못 배출했을 때 날아오는 과태료 고지서라는 '공포'가 더 큰 동기부여가 된다.

또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길거리나 여행지에서 발생하는 페트병과 캔들은 여전히 일반 쓰레기와 섞여 버려지기 일쑤다. 만약 한국의 편의점이나 대형마트마다 자다르와 같은 RVM 기계가 촘촘히 설치된다면 어떨까?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병들이 '돈'이 되는 순간,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완벽한 자원 순환 국가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0.90유로의 영수증이 가르쳐준 은퇴자의 자산 관리

계산대 앞에 선 아내는 방금 기계에서 받은 0.90유로짜리 바우처 영수증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잠시 후, 화면에 찍힌 전체 금액에서 정확히 그만큼의 숫자가 차감되었다.

할인 내역이 선명하게 찍힌 영수증을 받아 든 아내의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그 천진난만한 기쁨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0.90유로라는 숫자는 단순히 화폐의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이곳 자다르에서 찾아낸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무게였다는 것을 말이다. 단돈 1,500원이 우리에게 건넨 것은 경제적 혜택 그 이상의, 살아있는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문득 지난번 방문했던 '5개의 우물' 광장이 생각났다. 침략의 공포 속에서도 지하 저수조에 물을 채우고 관리하며 생존을 도모했던 자다르 사람들. 그 우물가에서 나는 은퇴자의 자산 역시 '관리'와 '절제'가 핵심임을 느꼈다.

우리가 사용한 플라스틱 병을 기계에 넣고 보증금을 돌려받는 행위 역시 본질적으로는 같다. 한꺼번에 큰돈을 버는 로또 같은 행운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자원(빈 병)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다시 순환시키는 정성. 그것이 훗날 우리 삶의 저수조를 마르지 않게 하는 두레박이 될 것이라 믿는다.

CO2 배출을 낮추고 지구를 지키는 거창한 담론도 결국은 내 지갑 속 0.10유로를 아끼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자다르의 마트 계산대 앞에서 다시금 확신했다.

자다르에서 꿈꾸는 한국형 '녹색 마법'

이제 우리 부부는 다시 숙소로 향한다. 가방 안에는 재활용한 보증금으로 할인받아 산 식료품들이 들어 있다. 비워낸 빈 병의 무게만큼 우리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한국도 '자원순환보증금' 제도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시스템을 안착시키는 과정에서 소상공인의 부담이나 운영 비용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자다르의 작은 동네 마트들조차 이 시스템을 수십 년째 유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 전체가 지불해야 할 환경 오염 비용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자다르의 바다 오르간이 우리에게 '비움'의 미학을 가르쳐주었다면, 자다르의 마켓은 그 비움이 어떻게 다시 '채움'으로 돌아오는지를 실천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마켓에서 빈 병을 하나씩 밀어 넣던 어느 시민의 투박한 손길, 그리고 그 옆에서 0.90유로의 행복을 만끽하던 우리 부부 같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처럼, 우리나라도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이 '돈을 벌러 가는 즐거운 산책길'이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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