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교 中대사관에 첫발 디딘 외교관… “돌이켜보면 모든 게 은혜”

2026. 2. 2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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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중의 외교 이야기] <6>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이 19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연락관으로 활동할 당시 받은 ID 카드 두 장. 카드 상단에 김 전 장관이 인도 측에 요청한 ‘3333’과 ‘9999’가 적혀있다.


내가 제9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연락관으로 활동할 당시 중국대사관 연락관은 사쭈캉(沙祖康) 서기관이었다. 처음 말을 걸자 그는 건성으로 답하며 악수도 안 했다. 그러다 1983년 국내서 발생한 ‘중공 민항기 납치사건’ 이후로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다. 외교단 모임인 서스데이 클럽 등에서 마주치면 악수도 하고 간단한 대화도 나눴다. 이 때문인지 이듬해 11월 초 중국대사관 주최 외교관 만찬에 초청받았다.

그날 저녁 중국대사관에 들어가자 중국 대사는 “당신이 중국대사관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국 외교관”이라며 반갑게 맞았다. 외교단 모임이긴 했지만 중공이 미수교국인 한국 외교관을 대사관에 초청했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사 서기관은 훗날 한중 수교 후 주중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북한 핵 문제를 다루는 국제국 부국장으로 내게 큰 도움을 줬다. 그는 군축국장과 주제네바 대사를 거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함께 유엔사무차장으로 근무했다.

1985년 1월 말 이정빈 대통령 정무비서관(훗날 외교통상부 장관)이 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나를 청와대로 파견하려고 한다며 이에 관한 의견을 물어왔다. 대사는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나 역시 따로 생각이 없었다. 대사는 ‘대사관 사정을 이유로 곤란하다’는 답신을 보냈다.

당시 인도에는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정부 간 국제법률협력을 위한 아시아·아프리카 법률자문위원회(AALCC) 사무국이 있었다. AALCC 제24차 총회가 85년 2월 7~14일에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려 한국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수석대표는 박수길 주모로코 대사(훗날 주유엔 대사)였고 대표는 장윤석 검사(훗날 국회의원)와 양승태 판사(훗날 대법원장), 나와 외무부 박병연 서기관 등이었다.

인도 출장 당시 홍콩에서 구매한 단파라디오. 인도를 포함한 여러 외교 현장에서 국내외 소식을 접할 때 긴요하게 활용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같이했는데 이때 모두 국내 소식을 궁금해하곤 했다. 나는 인도 부임 시 홍콩에서 구매한 단파 라디오를 네팔에 가져와 듣고 있었기에 이미 국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라디오로 접한 국내 소식을 전하니 다들 놀라며 신기해했다. 당시엔 실시간 방송이 없어 단파 라디오를 들으면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접하는 셈이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도 단파 라디오로 한국방송공사(KBS)의 국제방송, 미국의 소리(VOA)와 BBC 등을 매일 들으며 국내외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했다.

인디라 간디 총리 피살 직후 후임으로 간디 총리의 장남이자 집권당인 국민회의당 국회의원인 라지브 간디가 선출됐다. 라지브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은 84년 말 치른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관여했던 라지브 간디의 후배나 측근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라지브 총리 취임 이후 인도 정부의 장관 중 최고 실세는 아룬 네루 동력성 장관이었다. 라지브 총리 사촌인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외교단은 네루 장관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4월 말 대사는 내게 “네루 장관을 만나고 싶으니 만남을 추진해 보라”고 했다.

나는 라지브 총리의 최측근인 인도 국영기업 사장을 친구로 두고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니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네루 장관과의 면담이 내일 오전으로 결정됐으니 곧 대사실로 연락이 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장관이 대사에게 세 가지를 말할 것이니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라”고 했다. 다음 날 대사를 수행해 동력성 장관실로 들어가는데 과연 준비한 질문이 나올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네루 장관은 친구가 귀띔한 세 가지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덕분에 면담은 유쾌한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인도에 근무한 지 3년 반이 지날 무렵이었다. 85년 8월 말 귀국하는 것으로 발령이 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원경 외무부 장관의 7월 중 인도 방문이 추진됐다. 7월 18일 뉴델리에 도착한 장관은 공항에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아직 여기서 근무하느냐”고 했다. 그가 체육부 장관이던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개막식 때 만났으니 2년 8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이 장관은 라지브 총리와 부통령 등 주요 요인과의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네팔과 버마(현 미얀마)를 거쳐 서울로 돌아갔다. 그가 귀임한 지 오래지 않아 나는 이 장관 보좌관으로 발령이 났다. 장관 보좌관은 보통 국장을 지낸 간부가 맡는 자리였다. 과장도 못 한 내가 맡게 됐으니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의 근무를 돌이켜보면 그저 은혜였다. 담당 업무가 마땅히 없어 뉴델리 아시안게임 연락관을 맡았음에도 선수단을 위해 열심히 일할 기회를 얻었다. 또 그 과정에서 좋은 인도 친구를 사귀었고 이들과의 인연으로 하고픈 일도 마음껏 했다. 이 모든 건 고(故) 김정태 대사와 신동원 대사가 신임과 지지를 보냈기에 가능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더욱이 인생의 표상인 이원경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는 축복이었지만 당시는 이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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