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겁나서 몸땡이만 피했어"…바짝 마른 함양, 강풍·급경사 불 키워

" “겁이 나서 후다닥 나온다꼬 보따리도 몬 쌌지. 몸땡이만 나왔어….” " 23일 오후 1시쯤 경남 함양군 산불 임시대피소인 유림면어울림체육관에서 만난 소모(88) 할머니는 이같이 말했다. “다리 두 짝 다 수술해 걸음을 잘 못 걷는다”는 소 할머니 옆엔 지팡이를 두 개씩 짚고 다니는 80·90대 할머니 3명도 함께 있었다. 고무신·털신을 신고 몸만 급히 피한 이들 할머니는 구호텐트 안에서 도시락으로 점심 끼니를 해결했다. 올해 첫 대형산불로 번진 함양 산불로 대피한 송전마을 주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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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 부축해 대피…초장에 못 잡아 아쉬워”
함양 휴천면에 있는 송전 마을은 최초 발화 지점인 함양 마천면 창원리 한 야산에서 강 건너 2㎞ 떨어진 곳에 있다. 주민 69명이 급히 대피한 마을엔 사람이 없어 개 짖는 소리와 공중 진화에 나선 헬기 소리만 맴돌았다. 마을 한 귀퉁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전동 보행기도 1대 눈에 띄었다.
석연상(71) 송전마을 이장은 중앙일보와 한 통화에서 “대부분 70~90대 어르신들이다.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군 직원 등이 부축해 대피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처음 불났을 때 현장에 가보니, (불길이) 그리 세지 않아 보였는데 불길이 급경사를 타고 점차 확산했다”며“초장에 잡았으면 됐을낀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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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이어진 대형산불…5개 마을 164명 대피
지난 21일 경남 함양에서 발생한 산불이 사흘째 이어지면서, 22일 5개 마을 주민 164명이 어울림체육관 등으로 대피해 밤을 지새웠다. 산림당국이 밤낮없는 진화 작업을 벌였지만, ▶기상 ▶지형 ▶연료 등 ‘산불 확산 3요소’가 맞아 떨어지면서 불길이 좀체 잡히지 않고 있다. 장기간 비가 안 와 건조한 날씨에 불씨를 빠르게 확산시키는 강풍·급경사, 두터운 낙엽층이 연료 역할까지 했다.
이 때문에 21·22일 이틀간 진화율도 60·70%를 넘겼다가 다시 꺾이기 일쑤였다. 실제 올해 들어 함양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다.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따르면 올해 함양의 1·2월 강수량은 각각 0.9㎜, 1.7㎜로 평년(1월 22.8㎜, 2월 30.5㎜) 대비 3.95%, 5.57%에 그쳤다. 지난해(12.5㎜, 22.9㎜)보다도 적었다. 이번 달 강수량도 지난 2일 1.7㎜의 약한 비가 전부였다. 전국 곳곳에 겨울 가뭄으로 건조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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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 ‘찔끔 비’…바짝 마른 山에 불붙어
이 때문에 낙엽 등은 바짝 말라 산불 연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불이 나기 이틀 전(19일)부터 함양엔 건조주의보가 발령돼 있었다. 건조주의보는 목재, 낙엽 등 불에 잘 타는 물질의 건조도를 나타내는 ‘실효습도’가 35% 이하로 2일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효된다. 산불 발생 당일 함양의 시간대별 실효습도는 10~30%대일 정도로 건조했다.
실효습도가 40% 이하로 떨어지면 낙엽의 수분 함유량이 약 10%로 낮아지는데, 수분 함유량 15% 이하 낙엽은 35% 낙엽보다 발화율이 약 25배 높다고 산림청은 설명한다. 작은 불씨도 산불로 번질 위험이 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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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초속 20m 강풍…급경사 타고 불길 확산
야간에 몰아친 강풍도 산불을 키웠다. 전날(22일)산불 현장에선 한때 순간풍속 초속 20m의 매우 강한 바람이 불었다. 평균풍속도 초속 6m 안팎이었다. 산림청에 따르면 초속 6m의 바람만 불어도 무풍(無風)일 때와 비교해 산불 확산 속도는 26배 빠르다.
급경사인 산악 지형도 산불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위로 향하는 산불 특성상 경사가 급할수록 불길이 빨리 확산하는데, 30도 급경사지에서는 평지보다 최대 3배 빠르게 산불이 확산될 수 있다. 산림당국은 가파른 경사에 암반이 많고 해발 800m 안팎의 고지대에 산불이 발생한 탓에 지상 진화 인력 투입에 애를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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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확산세 누그러져”…진화율 83%
다행히 이날 강풍이 한풀 꺾여 산불 확산세가 누그러지면서 진화율이 올랐다. 이날 오후 기준 진화율은 83%다. 산불영향구역은 232㏊이며, 전체 화선(火線) 8.0㎞ 중 6.6㎞ 구간은 불길을 잡았다. 현재까지 인명 피해는 없으며, 시설 피해도 비닐하우스 1동 불 탄 것 이외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산림당국은 헬기 54대, 진화차 123대, 진화 인력 845명을 투입해 이날 일몰 전 주불 진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은식 산림청장 직무대리는 이날 현장 브리핑에서 “어제 저녁 북한산 정상 높이와 유사한 해발 860m 지점까지 산불이 확산됐다. 정상부의 경사가 급하고 일부 지역엔 암석지가 있어 접근 자체가 어려워 지상 인력을 통한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도“바람 세기가 어제보단 누그러져 주변 확산 우려는 덜해졌다”고 말했다.

앞서 산림청은 산불 발생 다음 날(22일) 오후 10시부터 산불현장 통합 지휘권을 산림청장(박은식 청장 직무대리)으로 전환했고, 30분 뒤엔 ‘산불 확산 대응 2단계’를 발령해 대응 수위를 높였다. 산림재난방지법상 산불이 둘 이상의 광역 시·도에 걸쳐 발생하면 산림청장이 통합 지휘하지만, 국가 재난으로 대형산불이 확대될 우려가 있으면 산불 규모와 상관없이 산림청장이 지휘할 수 있다.
함양=안대훈·김민주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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