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을 선례로 든 이유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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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에서 열린 국방장관 회의에서 엘브리지 콜비 미국 국방부 정책차관, 존 힐리 영국 국방장관,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 마크 뤼테 NATO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 AFP 연합뉴스 |
한국이 국내총생산 대비 3.5% 수준의 국방 지출을 약속하고 한반도 재래식 방어에서 주된 책임을 감당하려 한다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
뮌헨안보회의는 단순한 토론의 장이 아니다. 1963년부터 이어져 온 이 회의는 각국 정상과 국방·외교 책임자들이 모여 국제 안보의 흐름을 점검하는 자리이며, 이곳에서 제시되는 언어는 향후 정책 방향을 가늠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 회의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개념은 시간이 지나 정책과 제도 속으로 스며드는 경우가 많다.
이번 발언 역시 외교적 예의 차원의 언급으로 보기 어렵다. 미국이 동맹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앞으로의 책임 배분 구조가 달라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장면으로 읽힌다. 한국이 선례로 거론된 배경에는 단순한 국방비 수치 이상의 구조적 변화가 놓여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안보를 바라보는 틀부터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안보는 하나의 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을 막는 힘과, 전쟁이 현실이 되었을 때 이를 감당하는 힘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
이 구별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국제정치학자 글렌 스나이더는 이미 반세기 전, 억제와 방어를 구분하며 국가안보의 구조를 설명했다. 억제는 상대의 결정을 바꾸는 힘이고, 방어는 억제가 실패했을 때 피해를 줄이는 힘이라는 정의는 오늘도 유효하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구분을 한 단계 더 세밀하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 방어라는 이름 아래에는 전투 수행뿐 아니라, 전쟁을 지속하게 만드는 생산과 보급의 문제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장비는 소모되고, 탄약은 고갈되며, 전력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주듯, 승패는 누가 더 정교한 무기를 가졌는가보다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가에 의해 좌우된다.
억제의 신뢰성과 지속의 현실성
이 지점에서 억제와는 다른 층위가 선명해진다. 핵전력과 전략자산은 상대가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나 전쟁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산업과 행정, 보급과 정비의 체계다. 전쟁은 기술로 시작되지만, 지속의 구조로 결정된다.
따라서 안정된 안보 질서는 하나의 중심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억제의 신뢰성과 지속의 현실성이 동시에 유지될 때 구조가 완성된다.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쪽의 힘도 오래 가지 못한다.
문제는 지금 이 두 층의 균형이 재배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 시기에는 핵 억제가 질서의 중심이었다. 전쟁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파국을 의미했기 때문에 억제의 신뢰성이 거의 전부처럼 작동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다르다. 핵 억제는 유지되고 있지만, 재래식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다. 전쟁은 단번의 결전이 아니라 산업과 보급, 사회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시간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동맹의 의미도 바꾸고 있다. 전쟁을 막는 힘이 한쪽에 집중되어 있다면, 전쟁을 감당하는 힘은 각 지역에서 강화되어야 한다. 억제는 중심에서 유지되고, 지속은 분산되어 보강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뮌헨에서 나온 발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유럽이 재래식 방어에서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 그리고 한국이 하나의 선례로 언급된 장면은 동맹 기능의 재설계를 시사한다. 이는 해체가 아니라 배치의 변화다.
한국이 그 재설계의 사례로 호출된 이유는 국방비 비율이나 특정 무기의 성능에 있지 않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구조다. 한국은 전쟁을 예외로 둘 수 없는 조건에서 국가를 운영해 온 나라다. 안보는 선언이 아니라 상수였고, 전력 유지와 동원, 생산과 보급은 일상의 과제였다.
이러한 조건은 오랫동안 과잉으로 보이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과잉이 국가의 내성을 형성했다. 이러한 내성은 불과 몇 해 전 전 세계를 뒤흔든 감염병 위기 속에서도 한 차례 확인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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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제62회 뮌헨안보회의 부대행사인 주요7개국(G7) 장관회의에서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겸 부의장 카야 칼라스, 독일 외무장관 요한 바데풀, 영국 외무장관 이베트 쿠퍼, 미국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 프랑스 외무장관 장노엘 바로, 캐나다 외무장관 아니타 아난드, 이탈리아 외무장관 안토니오 타자니, 일본 외무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안드레이 시비하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 AFP 연합뉴스 |
이는 미국과의 균열이 아니라 조화와 역할 분담의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억제의 중심이 한쪽에 있다면, 지속의 축은 다른 쪽에서 강화될 수 있다. 두 힘은 대체가 아니라 보완 관계다. 동맹은 힘의 서열이 아니라 기능의 배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억제의 영역에서 경쟁하려 한다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이 의미를 갖는 지점은 핵과 전략자산의 중심을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재래식 전쟁의 장기화를 전제로 한 산업과 보급, 동원과 복구의 구조를 강화함으로써 억제 체계를 떠받치는 데 있다. 이 분업은 충돌이 아니라 안정의 조건이다.
이러한 방향은 한반도의 비핵화 원칙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핵 억제의 틀을 유지한 채 재래식 지속력을 강화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반복해 온 동맹 부담 문제를 완화하면서, 보호를 요구하는 관계가 아니라 책임을 분담하는 관계로 동맹을 재정립하는 길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운 역사적 조건은 국가 운영의 습속과 제도로 스며들었다.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비의 구조가 일상 속에 축적되어 있을 때, 국가는 격변 속에서도 흔들림을 줄일 수 있다.
한국이 억제 경쟁의 무대로 올라설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재래식 지속력을 강화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동맹 전체의 안정성을 높이는 길에 가깝다. 방산은 이미 한국의 중요한 수출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적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체질과 지속력을 형성하는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 질서가 바뀌는 순간마다 중심은 흔들린다. 그러나 질서를 지탱하는 기반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준비된 국가는 언제나 중심이 아니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한국은 그 기반이 될 수 있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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